[6월 18일] 창세기

2006-06-20 アップロード · 429 視聴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그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양의 성질을 알아보는 방법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이 때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몸이 마른 양이라도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쪘더라도 값이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보다 쉬운 것들에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는 현실 이면의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땀과 피를 흘려야 볼 수 있는 세상을 보는 사람, 바로 이 사람만이 값진 인생을 살수가 있습니다.

오늘로 롯의 이야기는 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은 롯이 아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그게 우리의 관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관심을 두면서도, 아니 그에게 관심을 두는데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능력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롯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롯은 엑스트라에요. 주연도 못되는, 조연도 못되는, 단지 성경의 역사에서 짧게 극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사람입니다. 그것도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불신앙으로 끝을 내는 불행한 사람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 이런 분들이 종종 있다는 거죠. 오늘로 롯의 이야기를 끝내고, 다음 주부터는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 극의 절정에 올라 있는, 아마 이때쯤이면, 사라가 벌써 임신을 했을 거예요. 우리 전도사님과 사모님들도 한방에 해결하셨겠지요. 우린 지금껏 기도해 왔습니다. 결혼한다고 할 때부터, 지금까지, 뭐라구요. ‘한방에’ ‘하나님 한방에 응답해 주세요’ 자세한 건 여러분이 알아서 상상하세요.
왜 지금쯤은 임신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냐면, 임신 사실은 임신 즉시 아는 게 아니라, 몇 주 지난 다음 알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쯤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상태일 겁니다. 그게 우리의 관심이죠. 무능력한 사람이 어떻게, 능력자가 되는가?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 인간이 무능력하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자는 누구인가? 그게 우리의 관심입니다. 그래서 우린 믿음으로 도전하는 거죠.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그를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으로 도전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좀 무겁습니다. 무겁다는 건, 사실 듣기 거북할 수 있다는 거죠. 듣기 거북하다는 건, 사실 우리도 이 주제에 노출되어 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심판의 즉각성이죠.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롯이 구원의 장소에 들어가기 까지, 비록 그 시간이 매우 짧은 시간일 수 있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인자’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롯은 하나님의 인자가 아니었다면, 그도 유황과 불 심판에 죽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실 모두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닌, 그중 누군가를 살리시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를 죽이는 것이라면, 롯에게 굳이 인자를 더할 이유가 없는 거죠. 그저 무지막지하게 심판하시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서워할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린 두려움으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께 결코 다가갈 수 없게 하는 죄,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키는 죄, 그걸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야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단면만을 아는 겁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심판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여러분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까?
그럼 하나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까? 혹, 두려움, 무서움, 죄책감, 이런 거라면, 여러분은 정말 잘못된 이미지만을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죠. 인간은 두뇌 능력의 한계 때문에, 5세 이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5세 이전이 가장 연약한 때입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 그게 5세 이전입니다. 먹고 싶으면 울고, 쌌으면 빽빽 거리고, 투정하고, 이때 부모가 한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좀 더 커서 잘못한 것을 혼낸 것, 때린 것만 기억하죠. 그리고 그 기억뿐입니다. 미안하지만,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있는 부모의 상은 한 단면일 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은 거대한 그림의 한 모자이크에 불과 합니다. 몇 미리 되지 않는 모자이크 조각을 우린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죠. 지난 주 말씀 드렸듯이, 여호와는 분명 광대하십니다. 그러나 그 표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은 마지막 때 주님의 재림의 모습을 미리 예견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에게 인자를 더 하십니다. 그러나 죄인과 죄에 대해선 단호한 분임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인자를 경험하기 위한, 회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의 과정중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메신저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탈락한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롯의 아내죠. 하나님의 메신저가 롯의 가족들에게 한 금기 사항을 다시 읽어 볼까요. 17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금기사항이 둘 이죠. 첫 번째는 ‘돌아보지 마라’두번째는 ‘들에 머무르지 마라’
하나님의 메신저는 두 가지 금기 사항을 말하면서, 어겼을 경우의 결과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두 가지 금기 사항을 말했을 뿐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에덴 동산에서의 삶의 법칙, 금기 사항을 말씀하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마라’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경우의 벌칙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 그것을 어겼을 경우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거죠.
여기서 ‘죽는다’는 건, 영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그건 그때 말씀드린거 기억할 리가 없겠죠. 하나님의 창조가 전인적인 창조인듯이, 즉 영적인 창조와 육적인 창조의 조화이듯이, ‘죽는다’는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는다’는 벌칙에서 육적인 삶은 보장하셨습니다. 이게 부모의 심정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의 메신저는 롯의 가족들에게 금기사항에 대한 벌칙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들에겐 벌칙이 없을까요? 벌칙은 벌써 이야기 되었죠. 이 성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는다’는 말씀의 연장선이죠. 따라서 누군가가 하나님의 메신저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는 심판받습니다. 여기서 당연히 심판받는다는 건, 죽음이죠. 여기서 죽음은 또한 온전한 구원에 대한 반대의 개념입니다. 그리고 롯의 아내는 죽었습니다.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건 ‘죽지 않았다’는게 아닌 ‘죽었다’는 또 다른 표현이죠. 롯의 아내를 소금 기둥이 되게 한 건, 상징적 의미입니다. 이걸 설화라고 한다면, 망부석과 유사한 것이구요. 이걸 상징으로 본다면, 그건 후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상징적 방법입니다. 이런 거 성경 여러 군데 나오죠. 유월절 절기도 그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수요 예배때 본문으로 읽고있는 여호수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드디어 요단 강을 건너고, 요단강과 길갈에 세운 12돌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길갈에 있는 12돌에 대한 의미를 후세대중 누군가가 묻게 되면, 그때부터 그 돌의 유래를 부모 세대는 반드시 알려 주어야 합니다. 누구 묻든 말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세대는 그 돌의 유래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소금 기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계보든, 또는 롯의 불신의 계보든, 저 소금 기둥이 뭐냐는 질문이 제기되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유래를 말해야 합니다.
‘저 돌은 롯이라는 사람의 아내다’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건 …’ 이렇게 말이 되는 겁니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는 구전으로 이 상징적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을 것이고, 문자가 발명되었을 때에는 기록으로 남겨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있는 거죠. 하나님의 메신저의 말을 들어라. 그가 전한 금기 사항을 어기지 말라. 강력한 메시지인 거죠. 여러분, 우린 믿음의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완성된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린 천국이 아닌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미안하지만, 롯의 아내 꼴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메신저의 말을 신뢰하지 않으면, 성경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으면, 우린 그렇게 됩니다. 롯의 아내야,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메신저의 말을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롯의 사위들처럼, 사실은 농담으로 여기지 않은 것만도, 대단한 겁니다. 그러나 그녀가 가야 할 곳은 어쨌든, 소알 성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이 가야할 것은 분명 있습니다. 그곳에 가지 못하는 신앙이라면, 지금껏 헛된 일을 한 겁니다.
롯의 아내가 왜 뒤를 돌아보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살던 땅의 그리움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그 도시의 매력 때문인지, 우린 모릅니다. 그런데 미안에게도 우리들중 누군가는 롯의 아내와 같은 경우가 반드시 생긴다는 거죠.
하나님의 메신저에 대한 또는 메신저의 말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 성경에 대한 이해나 복종, 결단이 부족하면, 그런거죠.
따라서 성경에 대한 신뢰를 갖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신앙 생활은, 종교 생활은 여러분, 여러분의 최종 목적지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건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앙이 말씀의 종교라면, 그렇게 믿는다면, 그 믿음을 더욱 굳게 할 수 있는 여러분 개인의 노력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겁니다.
믿음은 들음이라는 것, 들음은 오직 예수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 그런데, 사도 바울이 믿음은 들음이라고 한 것은 성경이 정경으로 채택되기 이전, 즉 많은 사람들이 문자로 기록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닌, 들려진 이야기로 예수를 듣던 시대의 상황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읽을 능력이 있고, 단지 의지만 부족할 뿐인데, 그 결과는 너무나 크다는 거죠.
롯의 아내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지금 단지 종교적인 활동만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신뢰의 중심에 서 있을 것인가? 그건 여러분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확연히 다르게 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롯의 두 딸의 잘못된 행동입니다. 결국 이 두 딸의 행동은 소돔과 소모라 성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지, 증언해 주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거죠. 그런데 그들의 구원은 반쩍 짜리였던 거죠. 몸은 구원받았지만, 영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을 포기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롯과 함께 소알 성에 들어간 사람들, 두 딸밖에 없습니다. 정혼한 사위들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죽었을 것이구요. 롯의 아내는 소돔과 소알 사이에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즉, 롯도, 롯의 두 딸도, 자신의 아내나 어머니, 사위나 남편될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왜 소금 기둥이 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리고 그 도시가 왜 하나님이 심판을 받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대를 잇는다고, 자신의 아버지의 씨를 잉태하려고 생각이나 할 수 있나요?
그런데 성경은, 롯의 두 딸이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큰 딸이 낳은 자손은 모압 족속이 되었고, 둘째 딸이 낳은 자손은 암몬 족속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대를 이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롯이 살고 있던 소돔과 고모라 성의 성적 타락은 극에 달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거죠. 그리고 그 도시는 쑥대밭이 되어 사라졌음에도, 그 죄악의 모습은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죄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죄와의 싸움은 치열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와는 가급적 접촉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믿음이 충만하다고, 자칫 죄에 물들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반드시 그 흔적은 남아 있게 됩니다. 본인의 단호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걸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홍수 이후, 살아 남은 사람들은 노아 가족뿐입니다. 노아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극찬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당세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죄악된 세상은 심판을 받았고, 이제 그 의인과 아들들, 며느리들만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죄의 근원인 불신의 계보는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어느날, 그 완전하던 사람이 실수를 하게 됩니다. 술에 만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누워있습니다. 이 모습을 그의 아들, 함이 보게 된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기록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물론, 함의 잘못 큽니다. 그걸 떠벌리고 다녀야 할 일은 없는거죠. 이 부분에서 저는 함보다는 노아의 실수가 컸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건 노아만의 실수는 아니다. 즉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 그 세력의 지배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건 다름 아닌 죄의 속성이라는 거죠.
그래요, 어찌 보면, 노아는 당시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죠. 그래서 성경은 그를 극찬하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가 그들만의 세상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존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런 아주 사소한 실수를 했다는 건, 완전한 인간이라도, 땅에 살고 있는 한, 죄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죠. 인간의 역사는 반복입니다. 노아의 사건이, 여러분 롯에게서 반복되죠. 롯의 사건은 현대에 다시 반복됩니다. 그럼 우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만큼 죄는 뿌리 깊고,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여러분이 십자가 밑에 있는 한, 여러분은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 중심의 삶을 살 때, 죄의 깊은 영향력에서 그나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본의 아니게 죄악중에 있다하더라도, 십자가는 그 죄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온전한 구원 속에 있다면, 죄의 쓴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 노력, 자기와의 싸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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