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일] 창세기 21:1-7

2006-08-18 アップロード · 2,720 視聴

오늘은 시 한 편을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과 손을 마주 잡아 보실래요. 불륜이 일어나지 않는 관계라면 잡아도 됩니다. 껄끄러우면 바꿔 앉으시던가? 어쨌든 옆에 앉아 있는 분의 심장을 느낄 정도로 손을 마주 잡아 보세요. 손을 잡고 두 눈을 감아 보세요. 소리는 아름답지 않지만, 시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니 벌써 함박웃음이 한 가득-입니다. 당신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기만 하 면 염된 환자처럼 입안 가득 함박웃음이 피어납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당신의 모습에서 그림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주위에서도... 둥근 함박웃음을 머금은 당신은 한결이요, 여상(如常)이라 합니다. 그런 당신의 그 모습이 제 마음을 한-가득 채웠습니다. 수년 전 어느 날 주위에 온통 먹구름이 드리워 있을 때도 유독 당신만은 가슴 가득 함박웃음을 노래하셨고, 해처럼 밝은 쪽빛이 금세 쏟아져 내릴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 오실 것만 같은 감격의 당신, 적어도 나에게는 감격의 불꽃이요, 내 가슴의 푸른 은하수입니다. 내 속에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모습으로 스며들어 온 당신!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듯한 봉숭아꽃처럼 벅찬 설렘을 주십니다.
- 소 천 -


어떻습니까? 좋죠. 지난 한주 내내, 이 시만 생각했습니다. 내 아내, 여러분,
전 여러분들이 이 시 처럼,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런 분이길 원합니다. 예수 믿는 맛, 그게 함박 웃음 아닐까요? 교회 다니는 진정한 기쁨의 표시, 그게 함박 웃음 아닌가요?
여러분들중, 혹 웃음을 잃으신 분 있다면,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 반드시 함박 웃음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구십 평생중 결혼 한 이후 단 한번도 웃음을 뛸 수 없었던 사라가 드디어 웃습니다. 이 웃음은 정말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마치 뭐에 혼린듯, 지나가는 새의 물 본듯, 그런 웃음입니다.
사라는 고백하죠.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
결혼 이후, 더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미지의 땅 가나안에 온 이후 사라는 웃음을 잃었습니다. 애굽에서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그건 정말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말 이스마엘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려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포기한 건, 그의 경수가 끊긴 것을 알고 부터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다고 우겨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18장에서 하나님의 메신저가 아브라함에게 거듭 약속하는 말을 들을 땐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여러분, 혹 여러분들중, 사라처럼,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한계에 묻혀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분 없습니까? 사라처럼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는 분 없습니까?

재미있죠. 실소를 금치 못했던 때가 엊그젭니다. 기껏 해야 길어야 2개월 전의 일입니다. 2개월 전의 사건을 잊었을리는 없겠죠. 그런데, 지금은, 앉아있어도 웃음이 납니다. 먹을 때도 웃습니다. 종과 말 할 때도 웃습니다. 재밌죠. 인생이 다 그런겁니다.
여러분, 이때 사라가 2개월 전 자신이 하나님의 메신저의 말을 들었을 때 실소했던 걸,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걸 실수라고 인정할까요? 그때 하나님의 메신저가 들려주는 말을 믿을 걸, 아니, 남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을 때, 그때부터 믿음을 잘 키워올 껄, 혹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에 대한 정의를 아주 정확히 하고 있죠. 다같이 한번 해 볼까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이는 것 처럼 믿는 것’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도 믿음에 대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롬4: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롬4:19절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했다.’
롬4:20절입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롬4:21절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랬다. 몸이 죽은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 확신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 그게 믿음이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가요? 바랄 수 없는 중에 아브라함처럼 바라고 있나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것이거나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건 구체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어떤 열정, 용광로와 같은 열정, 그 열정을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과연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갖게 되었을까? 여러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의조상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높은 단계의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초지일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우리처럼 믿음의 굴곡이 있었습니다. 해서는 안되는 일도 했습니다. 그런 연약한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도 가능성이 있는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좋으면 두 말 할 나위 없죠. 그러나 그런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수많은 굴곡을 겪게 되고, 어떤 사람은 결국, 미끄러져 낙오하고, 어떤 사람은 굴곡의 과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굴곡의 과정을 잘 헤쳐나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과연 여러분과 나는 어떤 유형에 속하게 될까요? 지금은 비록 연약할 수 있지만, 지금은 내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 때문에, 그 한계속에 갇혀 있지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도전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약속을 능히 성취시킬 것을 확신하는 믿음, 그리고 그 열매를 얻게 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난, 여러분의 지금의 믿음이 별거 아니라도 그것 가지고 여러분은 평가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것, 정말 저건 아닌데, 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 때문이 아닌, 믿음이 부족한 것을 알지 못하는 건, 지금 자신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 그게 안타깝습니다. 저는 충분히 여러분들에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무능력 속에 있는 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지, 알아 듣는지, 못 알아 듣는지 모르겠지만, 하지 않을 때 그때 그걸 평가하는 거죠.
오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결과를 얻는데, 성경의 구조 속에서, 무엇이 그걸 가능하게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 창세기 21장을 본문으로 읽었죠. 저는 지난주, 창세기는 17장 다음에, 21장을 읽어도 문맥적으로 큰 이상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니 문맥적으로만 큰 이상이 없는게 아니라, 그게 더 은혜스럽죠. 왜냐하면,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출애굽기32장에 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모시에게 자신의 존재를 밝히시는데요. 그것보다 훨씬 오래전에, 그리고 그 본문보다 더 분명히 자신의 존재를 밝히셨는데요. 그건 다름아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는 표현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의미 속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17장에서 재차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할례를 명하죠. 그리고 21장을 읽으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태어납니다. 이 구조가 더 은혜스럽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와 닿습니다.
그래서 전 여러분들에게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을땐, 창세기17장을 읽고, 바로 건너 뛰어서 21장을 읽으라고 권했던 겁니다. 17장과 21장, 연결고리는 할례입니다. 할례가 유대인들이 착각했던 그런 할례가 아닌, 할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표를 참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기 전 할례를 행했습니다. 출애굽 2세대들은 여리고 성 공격을 앞두고 할례를 행했습니다. 여기서 공통점은 할례를 행한 다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는 중요합니다.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할례는 아브라함이 했던, 출애굽 2세대들이 행했던 양피를 베는 그런 할례가 아닙니다. 또한 마음에 하는 할례의 의미도 아닙니다.
저는 할례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기전, 하나님을 믿어 왔습니다. 적어도 창12장 이후부터는 믿어 왔습니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거죠. 따라서 이건 불신자가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과정으로서의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의 생활 이후에 부여되는 또는 가져야 하는 어떤 믿음의 단계, 즉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서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다음, 할례를 행하고, 바로 이삭을 얻었습니다.
출애굽 2세대들 그들도 구원의 여정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여리고 성 공격을 앞둔 그 긴박함 속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 가나안 정벌 전쟁을 승리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받고, 약속의 성취를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매우 중요한 신앙의 한 요소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다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고자 한다면, 할례를 행하십시오. 할례를 아브라함의 이야기, 출애굽의 이야기 속에선 약속 성취의 전조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한 다음, 그의 신앙은 몰라보게 달라집니다. 물론 20장에서 보이지 않는 실수, 그는 분명, 기억하고 있지 못할 겁니다. 20여년 전 자신이 애굽에서 했던 거짓말,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되는 거짓말을 다시 반복했지만, 적어도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구조속에선,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땅에 살고 있는 한 인간에게 완전자는 없습니다. 완전하고자 달려갈 뿐입니다. 달려가다보면, 어딘선가 넘어질텐데, 그렇게 달린 자를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그정도의 능력밖에 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단지, 능력이 충분함에도, 하지 않을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버리듯이, 그렇게 냉정하게 버리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다. 롬2:4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길이 참으심 앞에, 감사하십시오. 그가 참으시는 것은 나를 살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나를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참으실 때, 그때 하나님께 회개하세요. 그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세요.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창세기를 17장 다음에 21장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할례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경의 일점일획도 무오하다고 고백하는 입장에선, 18,19,20장을 읽지 않을 수 없죠. 그래요, 17장 다음에 21장을 읽지 않고, 18,19,20장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20장, 정말 전 설교하기 싫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20여년 전 했던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거든요. 여러분, 이런 사람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나요? 적어도 우리하고는 좀 달라야 하지 않나요? 우리하고 다른게 뭐 있어요. 그런데 창세기 20장엔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를 17장, 다음으로 21장을 읽지 않고, 성경이 편집된 대로, 17장, 18장, 19장, 20장, 그리고 21장을 읽을때 우린 20장을 끝내는 내용이 무엇인지 우린 알아야 합니다. 그건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기도, 우리가 중보라고 말합니다만, 중보기도든 그냥 기도든, 기도라는 거죠. 아브라함의 중보에 의해, 아비멜렉의 태의 문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것도 여종까지 열렸다는 거죠. 중보의 능력은, 불법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예배 안내지에 중보기도에 대한 연재가 벌써 22과 째입니다. 1과부터 꾸준히 잘 정독하신 분들은 분명, 중보기도했을 겁니다. 지금이야 중보라는 말이 있지만, 이때는 없었죠. 그래요,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한번, 성경에 있는 내용중에서 잘 된 기도 응답, 잘못된 기도 응답, 응답되지 않은 기도, 3가지 유형으로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1. 잘된 기도 응답 :
한나의 기도예요. 한나는 고통중에 기도하여, 그리고 서원하여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대로 바쳤죠.
2. 잘못된 기도 응답 : 히스기야-므낫세
물론 히스기야가 므낫세를 얻기 위해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생명 연장을 얻은 다음 나은 아들이 므낫 세입니다. 그 아들이 남유다의 가장 악한 왕이 되었고, 성경의 신학적 평가는 그로 인해 남유다가 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 다.
3. 응답되지 않은 기도 : 요시야-다니엘
요시야는 8세에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철부지, 어린 나이에 그는 국가 최고 책임자가 된 거죠. 그의 아버지는 악한 왕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국가 개혁에 착수합니다. 당연히 중교개혁이죠. 그때 정말 우연히 율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율법책의 내용을 듣습니다. 어린 요시야는 그 율법책을 다 듣고 통곡합니다. 왜 우리의 국운이 이렇게 쇠퇴하는지, 그 율법책에 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죠. 율법책대로라면, 남 유다는 벌써 망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건재, 아니, 명맥만 유지하고 있죠. 그것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자신이 직접 읽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빛줄기를 발견합니다.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린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하나님께로 돌리겠습니다. 이 백성들이 더 이상 이방 신상에 절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왕명을 어기면, 능지처참하겠습니다. 열심히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시야가 열심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유다는 멸망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경우에 비한다면, 요시야의 개혁은 더 진전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는 생명연장을 허락하셨고,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요시야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요시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계획이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요시야로 하여금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을 양육토록 하셨습니다.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은 세계의 통치자는 바벨론 제국이 아닌, 느부갓네살 왕이 아닌, 하나님 자신임을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미래에 될 일에 대하여 다니엘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기도 응답받지 못했다고, 믿음을 잃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당신의 계획을 지금 실행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17장을 읽고, 21장을 읽을 때, 핵심은 할례라고 했죠. 그리고 20장, 다음에 21장을 읽을땐, 기도, 중보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행했습니다. 그럼, 여러분, 창세기20장과 21장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기도, 또는 사라를 위한 중보를 했을까요? 기록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분명, 할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기도 중요합니다. 그럼, 기도했을까요? 그건 여려분들이 대답해야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분명 17장엔 어떤 단서를 줍니다. 할례를 행했다. 그리고 20장 기도입니다. 여러분, 이 글을 읽고, 지금 설교를 듣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데, 있어, 할례는 중요하다. 그래서 할례를 행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데, 기도는 중요하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이 부분을 읽는 독자에 돌렸다구요. 여러분이,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부분, 창세기20장과 21장 사이, 이 갭이 얼마인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길어야 2개월입니다. 약속의 성취는 임신의 순간부터가 응답입니다. 임신의 순간을 아는 건, 입덧을 시작 할 때죠. 아니면, 몸에 어떤 이상 징후가 보일 때, 그건 여성분들이 잘 아시겠죠. 그래서 길어야 2개월 이라는 겁니다.
24년, 허송 세월하고, 2개월 만에 응답받았다. 여러분, 이것도 수지맞은거 아닌가요.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를 넘기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른 어느 젊은 청년이 인터뷰하며 한 말입니다.

“천재라는 건 없습니다. 남들보다 10배 노력하는 사람이 일류가 되고. 일류보다 그 사람보다 10배 더 노력하는 사람이 최고가 됩니다.” 세계 정상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을 물리치고, 후지스배 정상에 오른 박정상 프로 9단의 말입니다.
그래요, 여러분, 이왕 할거라면, 일류가 되기 위해, 10배 노력하세요. 그리고 할거라면, 다시 10배 노력하세요.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이왕 할거라면, 남들보다 부지런히 10배는 더 해 보세요. 그 사람보다 10배 더 기도해 보세요. 분명 모래가 변해서 금이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ag·7월,16일,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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