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창세기 21;1-7

2006-08-19 アップロード · 442 視聴

시 한편

당신을 기다립니다
끝없는 기다림으로
슬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면서부터
그 수많은 고통 속에 지내면서도
여전히 내 마음은 둥-근 입니다.
내가 원하는 소망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당신과 하나 되어 쏟아져 찬란해지는
은하수처럼 그러한 마음이길 원합니다.
길가에 드러누운 풀잎이
단비를 기다리듯이 잠시의 목마름으로
당신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잠들지 않겠습니다.
이제 목말라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을 위해
새하얗게 밤을 새고 기다리겠습니다.
험한 숲 속을 헤쳐야하는
모진 사랑이라 할지라도
무수한 별을 잃고
슬픔에 잠긴 고통이 온다 해도
난 굳이 문을 닫으려 하지 않겠습니다.
세상 모두가 돌아앉았더라도
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 소 천 -


기도 응답에 대한 기쁨은 누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도 응답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또는 그 기억이 가물 가물 하다면, 사라의 모습을 통해, 우린 기쁨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전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이 기도했는지, 사라가 한나 처럼 기도했는지, 성경의 기록이 없기에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면, 그는 창세기 20장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는 분명 열심히 기도했을 겁니다.
한나 처럼, 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통 속에 기도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알았거든요. 아? 기도만이 살 길이구나, 나의 무능력 가능태로 바꿀 수 있는 건, 기도구나. 하나님은 나에게 아비멜렉과의 사건을 통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구나. 그는 이런 것에 있어서는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 하면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 ‘어’ 하면 ‘어’를 분명히 아는 사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수 있는 사람, 그가 아브라함입니다. 여러분들이 미안합니다만,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하지 못할 때,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탁월했습니다.
‘아’,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고 판단되면, 자신의 믿음의 상태에 관계없이, 순종하는 것, 히브리서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불순종임을 밝히고, 강조하는 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죠.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아브라함은 탁월했습니다. 난 여러분들이, 아브라함의 이 부분을 본받길 바랍니다.
정말, 성경에 손을 얹고,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매주 고백한다면, 성경에서 요구하는 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들에게 순간적인 고통을 줄 수 있죠. 잠, 자지 못하면 피곤하죠. 쉼, 갖지 않으면, 내일 당장 일할 수 없죠.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이걸 넘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이구요. 넘지 못하면, 미안합니다만, 여러분은 공염불하는 겁니다.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그들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들은 믿음의 아비, 어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부분에서는 탁월한 것인데, 나와 비슷하게 해석해야 되겠습니까?
그들은 나와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아마 내가 아브라함처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이 모양 이 꼴일 수 있습니다. 그게 나의 한계죠. 그래서, 나는 도전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취할 겁니다. 나는 삶의 원칙을 알아요. 내 삶의 원칙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난 어떤 경우에도 이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위에 굳게 선 자, 하나님은 반드시 그 뜻 안에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요셉처럼, 다니엘 처럼, 사도 바울처럼, 나는 요셉처럼, 그가 한 그대로 할 겁니다. 다니엘 처럼, 할 겁니다. 죽는다 하더라도, 난 할렐루야 할 겁니다.
그리하든 안하든 그건 그분 마음입니다. 난, 단지 그분을 향한 믿음만을 가질 뿐입니다. 그럼 분명 하나님은 다니엘서의 사건처럼 하실 겁니다. 그게 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21장 1절에서 사라를 ‘권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2:23-25절에서 ‘권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상1:19절에서 한나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2절의 말씀처럼 사라는 육신적 불가능함을 극복하고 잉태의 축복을 얻었습니다. 난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의 불가능 속에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빛나길 축복합니다. 우린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단지 그들만 종살이 하는 것이 아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을 후손들까지도 종으로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은 더욱 늘어가고, 감시는 심해지는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임으로 고통 받고 있던 한나가 위대한 종 사무엘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이제 우리가 이 부분을 정리 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기도를 해야만 응답하시는가?
우리가 은혜, 은혜하는데, 은혜라면 마치 공짜인것 처럼 느껴지는데, 과연 은혜에, 믿는자들의 반응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은혜앞에 우린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아도 되는가? 은혜라고 해서, 우리의 어떤 행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에 앞서는 것도 아니구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어떤 행위 그건 필요합니다. 물론 구원은 불가능하죠. 그러나 우린 지금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람, 아브라함과 사라, 또는 한나, 이스라엘 백성, 다 믿음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다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거죠. 이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받기 위한 어떤 행위는 필요했던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구요.

성경의 구조를 면밀히 분석하는 건,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가르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창세기는 17장 다음에, 21장을 읽어도, 문맥적으로, 전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18,19,20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린 반드시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20장과 21장 1절 사이, 그리고 21장 1절과 2절 사이의 구조, 말씀입니다.
물론 이 구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21장1절입니다.

21장 1절은 ‘하나님께서 사라를 권고하셨다.’인데요, 다른 풀이는 ‘하나님께서 사라를 돌보셨다.’ 이걸 좀더 구체적으로 풀면, ‘하나님이 사라를 어여삐 보시고 돌보아 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어여삐 보시고 돌보아 주셨다.’ 누군가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어여삐 보도록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브라함인지, 사라인지, 두 사람 다 인지, 사실 알 수 없습니다. 한나의 경우, 사실 궁한 사람인 한나가 미치도록 기도한 거죠. 그의 남편 엘가나는 한나에게 아들이 있든 없든 관계하지 않습니다. 한나를 사랑하고 한나에게 더 많은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라이죠. 그러니 엘가나는 굳이 한나처럼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아들이 더 필요하면, 또 다른 첩을 얻으면 되구요. 엘가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전혀 다릅니다. 한나는 한나만의 문제였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둘 다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정황을 놓고 본다면, ‘하나님이 어여삐 보시고 돌보셨다’ 라는 말은, 결국 그들이 무엇인가? 즉 어여삐 볼 만한 짓을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어여삐 보실 수 있도록 하는 건 많지만, 창세기 20장과 연관시킨다면, 당연히 기도죠.
하나님께서 무능한 우리, 불가능한 현실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적극적인 반응, 믿음 안에서의 반응입니다.

여러분, ‘돌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권고, 권념은 다 ‘돌본다’를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과연 돌본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더욱이 하나님이 돌보신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돌보신다. 이런 개념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 한나의 이야기, 출애굽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 구조 속에서 우린 이 부분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 세 유형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죠. 즉 이런 겁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아이들을 키웁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돌보는 거죠. 그런데, 아이가 아직도 어린 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열이 납니다. 39도에 접근하죠. 이런 경우에 ‘돌본다’는 의미와 건강할 때 ‘돌본다’는 의미는 조금 다를 겁니다. 아니 많이 다를 겁니다. 제 기억으로, 이레는 어렸을 적 열이 많았습니다. 일 년에 서너번, 다섯 살 이전에 꼭 청구성심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한 두번은 응급실로 달려갔던 기억도 있구요.
처음, 열이 39도를 넘을 때, 그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하더라구요. 그리고 정말 하늘도 깜깜하구요. 그래서 병원에 갔습니다. 나는 가슴을 조리면 응급실로 갔는데, 응급실에 근무하는 젊은 의사선생님은, 단지 알코올만 쓱쓱하고 말더라구요. 나는 초조한데, 그런 것도 없이. 알코올만 바르고 마는 겁니다. 그리구서 알았죠. 아 열이 나면, 알코올을 바르면 되는구나. 즉 먼저 열을 내리는게 상책이구나. 그다음부터는, 정말입니다. 여름이구, 겨울이구, 열만 나면, 열 내리는 일을 합니다. 겨울에는 물을 미지근하게 해서, 집어넣습니다.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두 손을 싹싹 빌며, 잘못했다고 해도, 우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열을 내리게 합니다. 그리고 병원에 갑니다. 응급실은 벌에 쏘였을 때, 그때 이외엔 더 이상 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건 돌보는게 아닌가요. 오늘 제가 하나님께서 돌본다는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레가 청구성심병원에 입원하면, 4, 5일은 보통입니다. 어떤 때는 일주일 이상을 병원에 있었습니다. 결국 폐렴이죠. 그때, 저도 직장을 다녔고, 전명심 전도사도 직장에 다닐 때입니다. 나만 피곤한건 아니죠. 그런데, 병원에서 자고 출근하는 사람은 전명심전도사였습니다. 여러분, 잠을 제대로 잤을까요? 쉬기를 제대로 쉬었을까요? 저야, 퇴근하고 한 두시간, 정도지만, 전명심 전도사는 아예 병원에서 출퇴근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패턴은 병원에 있는 이레에게 집중됩니다.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으면, 잘못한 것에 대해선 책망도 하고, 채찍도 들지만, 즉 우리 기준으로 아이를 돌보지만, 병원에 입원하면, 아이 입장에서 돌보게 되는 겁니다. 그 아이의 생활 범주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거죠. 사실, 이레가 병원에 입원했지만, 우리의 삶이 있죠. 생활 패턴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있는 동안엔 모든게 올 스톱이죠. 그리고 이레에게 집중됩니다.
이 정도면, 사라를 돌보았다.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았다. 한나를 생각하셨다는 말을 설명하는데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권고하셨다는 건, 오직 사라의 문제, 그 문제에만 집중하셨다는거죠. 하나님도 하실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 걸 다 포기하고 사라에게 집중하셨다는 거죠. 한나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럼 대체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의 영역을 포기하고 자기에게만 집중하게 하려면, 대체, 기도를 어떻게 했다는 건가? 그 답이 나오는 거죠.
그리고 돌본다는 건, 돌봄의 시기가 있다는 거죠. 지금이야 말로, 사라에게는 돌봄의 시기죠. 지금은 사라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나처럼, 돌봄을 받은 시기가 끝나면, 이제는 하나님을 정말 기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에게는, 그리고 여러분과 나에게도 하나님의 돌봄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것도 어여삐 보시고 돌보심이 있어야만 할 때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기도할 때 인 겁니다. 저는 요 며칠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강은경 전도사님, 김바울 목사님,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좀더 기도하라는 요구이신 것 같아요. 우리 스스로가 어떤 문제를 찾아 기도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시는 것도 한 방법이죠.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어여삐 보시고 돌보셨습니다. 그럼 돌봄으로 끝나느냐? 그게 아니죠. 그 돌봄의 결과가 있습니다. 이 결과가 없다면, 굳이 하나님이 어여삐 보게 해야 할 필요도 없죠.
사라는 열심히 그래요, 정말 열심히 하나님이 어여삐 보실 수 있게 했습니다. 그동안 실수도 많았고, 믿음 없는 짓도 많이 했지만, 이젠 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마지막일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그녀는 대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을 얻었습니다. 사실 여러분, 90세 가까운 ‘사람이 아들을 낳는다’는게 말이 됩니다. 이게 상식적으론 이해되지 않죠. 노산인데요. 이건 노산도 아닌 노산 할아버지죠. 그런데 성경은 순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라는 웃습니다. 그것도 함박웃음을요. 지난주 시 한편을 읋어 드렸습니다만, 난 여러분 모두가 언제나 함박 웃음을 웃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사라의 웃음은 함박 웃음 그 이상입니다. 앉아도 웃고, 밥을 먹을 때도 웃고, 아들을 낳으면 그러나, 귀하도 그랬나요.
어쨌든,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면, 권념도 좋구요. 생각도 괜찮습니다. 권고하시면, 그 권고의 결과물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라가 그걸 우리에게 증거하지 않나요, 한나는 어떤가요. 이스라엘 백성은요. 그게 우리가 믿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여러분들도, 요 몇주 계속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권고하실 만한 짓 좀 하세요. 그것도 어여삐 보셔서, 권고하시는 짓 좀 하시라구요. 하나님은 반드시, 사라처럼, 누구나 권고하시려 합니다. 한나처럼 생각해 주시길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차례가 될 수 있도록, 한번 해 보세요. 그럼, 반드시 하나님은 권고하시고, 그 권고의 결과물을, 어떤 형태로든, 여러분들에게 허용하실 겁니다.
그 기쁨을 맛보시려 시도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한번쯤, 죽기 살기로 도전해 보지 않겠습니까? 죽기 살기로 기도하다보면, 믿음은 남잖아요. 그리고 제가 분명히 장담하건데, 그 믿음, 지금 당장 응답받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하나님께, 매달린 그 믿음이, 여러분의 앞날, 미래를 보장하게 될 겁니다. 10년 뒤, 여러분의 삶은 정말 달라져 있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ag·7월,23일,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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