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창세기 21:1-7

2006-08-21 アップロード · 1,200 視聴

(8월6일은 모스크바에서 사역하시는 김바울 목사님께서 특별히 우리 교회에서 설교를 해 주셨는데, 약간의 기계 고장이 있어 올리지 못했습니다.)

1절에서 우리가 ‘권고’에 대해서도 말했죠, ‘행하신다’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또 1절에서 ‘그 말씀대로라’는 의미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2절에서 ‘사라가 잉태했다’에 대해서도, 그리고 ‘늙은 아브라함에게’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권고의 의미가 뭐라구요. 돌봄입니다.
여러분 이해는 하셨나요. 혹시 제가 부족하게 설명한 것은 없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제 설교가 이해가 되십니까? 대단하십니다.
이해하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설교해야 하는 이 연사의 아픔을 그 누가 알아주리요. 여러분 정말 창세기21장 1,2절 제가 설교한 것을 이해하고 있나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 성경의 내용은 이해가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을 이해했느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확신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주관적인 겁니다. 그 주관적인 신앙을 어떻게 객관화 할 수 있느냐? 에게 관건이죠.
이해는 관념적일 수 있지만, 확신과 믿음은, 관념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동사여야 합니다. 난 여러분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성경의 단어를 이해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난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믿게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 개인의 문제죠. 나는 성경을 믿기에 설교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믿도록, 어떻게 해서든지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하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듣던지 듣지 않던지, 이 연사는 굳세게 외치는 겁니다.
제가 몇 주에 걸쳐 성경이 구조를 여러분들에게 분석해 드렸죠. 창세기17장 다음에 21장을 읽어도 문맥적으로 이상 없다. 20장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20장에선 중요한 것이 기도다. 그리고 21장이다. 21장 1절, 2절의 구조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복습해 볼까요?
21잘 2절, 이삭이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21장 1절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즉 하나님의 권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권고하도록 하는 건, 창20장의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21장 2절이 되려면, 반드시 21장1절이 선행되어야 하구요. 창21장1절이 되려면, 우린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이걸 아주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권고하시고,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면 바로 응답입니다.
여러분 혼돈하지 마세요. 제가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 이 본문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말씀에 비해서 기도가 강조되는 건,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줄곧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걸어오십니다. 창세기12장부터 계속 약속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잊을만 하면, 하시고, 실망할 만하면 하시고, 포기할 만하면, 약속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따라서 지금 아브라함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말씀이 아닌 기도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사람은 말씀을 열심히 읽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기도를 빡세게 해야 할 것이고,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말씀이 부족하다면, 말씀을 읽던가 설교를 잘 듣던가 해야 합니다. 또 둘 다 부족하다, 그럼 남들보다 더 부지런 해야죠. 기도도 빡세게 해야죠. 말씀도 읽거나 설교를 들어야 할 텐데, 시간을 쪼개지 않고서야 가능하겠습니까?
이 구조 속에서 인간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을 구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인간이 해야 하고, 하나님은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직접하셔야 합니다. 이것도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마귀가 가로채는 경우죠. 그래서 우리의 축복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연원하는가? 아니면 마귀인가? 라는 걸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빛이죠. 마귀의 속성은 어둠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생명입니다. 마귀의 속성은 죽음입니다. 이 속성을 갖고 비교하면, 이게 대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인지, 아니면 마귀가 나를 미혹하기 위한 것인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자, 아브라함이 이야기에서 확인해 보자구요. 아브라함이 기근으로 애굽까지 갔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애굽을 가서는 안되는데, 아브라함은 기근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거기까지 간 겁니다. 애굽에서 그는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했죠. 그래요, 누이 맞습니다.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죠. 말을 하려면, ‘누이지만 지금은 아내다’라고 했어야죠. 그런데, 그냥 누이라고 했죠. 그래서 바로가 흑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재산을 건네 주죠. 이건 거래라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을 거래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 행동은 곤란한 겁니다. 아니 곤란하다는 말로는 되지 않습니다. 절대 해서는 안되는 짓입니다.
이게 과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이냐? 제 결론은 이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이런 방법으론 당신의 택함 받은 백성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빛의 속성대로, 생명의 속성대로 축복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일확천금을 꿈꾸지 마세요. 정당한 노동이 아니면, 그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건, 결코 썩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반드시 썩습니다. 그러나 예외는 있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중, 타락으로 인해서 썩게 된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이죠. 인간의 타락은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러분, 금이 썩지 않을 것 같죠. 반드시 썩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금을 썩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는 거죠. 금을 썩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영원히 썩지 않는 믿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약화되는 겁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썩게 만들죠.
20장과 21장 1절, 2절을 구분하면, 20장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21장은 하나님의 영역이에요. 권고하시는거, 그건 하나님 마음입니다. 권고하든 안하든 그건 하나님 마음입니다. 출33:19절에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권고는 하나님 마음이죠.
이제 21장에서만 분석해보면, 21장 1,2절은 하나님의 영역이구요. 3절이하, 특히 4절의 ‘할례’는 인간의 영역입니다. 즉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 반응입니다.
응답받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 적절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이걸 이렇게 표현하기는 좀 곤란합니다만, 하나님과 인간은 주고 받는 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주시든지, 인간만이 주던지 이건 곤란합니다.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과 인간이 일대일로 주고받을 순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간, 아니 어떤 경우엔 많이 손해보시죠. 그러나 어쨌든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 받고 말게 되면, 그건 잘못된 방향으로 반드시 틀어집니다. 즉 은혜가 은혜가 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받은 은혜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정말 기쁘게 하셔야 합니다. 그건 개인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반응을 반드시 보여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의 구조가 더 추가됩니다. 창세기20장과 21장 1,2절의 구조 속에, 4절이 추가됩니다.
20장은 인간이 해야하는 일, 21장 1,2절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리고 4절은 다시 인간이 해야 할 일, 어떤 인간일까요. 응답받은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이삭이 할례를 받는 것’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손짓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 손짓을 보고, 반드시 반응하십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가 있게 되는데, 그 반응의 결과를 경험한 사람은 그 반응의 결과에 다시 반응하게 됩니다.
우린 단지 창세기 21장의 구조 속에서만 이걸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더 진전시키지는 않겠습니다만, 하나님은 당신께 어떤 형태로든 반응하는 인간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다시 하나님은 그 반응에 반응을 하십니다. 그럼 다시 또 인간도 반응하는 거구요. 이 구조를 이해하게 될 때, 그리고 믿어질 때 그 사람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구조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알게 됩니다. 아, 하나님은 반드시 내가 한 행동에 반응하신다, 이걸 철저히 이용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20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손짓합니다. 이 손짓은 단순한 손짓이 아닙니다. 호소력 있는 손짓, 절박한 손짓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손짓에 반응하셔서, 권고하셨고,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할례를 합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주고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주고,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주고, 다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줍니다.
여러분이 이 구조를 잘 이해하시고, 정말,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가지세요. 그리고 이걸 잘 이용해 보세요. 응답받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다시 반응하는, 이삭을 얻은 다음, 그것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반응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건 아주 간단한게 아닙니다. 이게 쉬운게 아니에요. 왜 아브라함이 믿음이 조상이냐? 그가 믿음의 조상일 수 밖에 없는 첫 걸음이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요. 전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얻은 때부터 그랬느냐?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도 믿음의 부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했던 때도 있습니다. 잘못된 거래의 결과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했던 때도 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부턴 전혀 다른 믿음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인가? 왜 하나님은 이런 믿음이 부침이 있던 사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하시는가? 그는 우리와 뭐가 다른가? 그걸 오늘 설교가 분명히 제시하게 될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21장에 와서, 얼마나 성숙해 졌는지, 그건 단지 21장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20장도 어떤 역할을 했을거구요. 17장, 18장, 19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가 21장 4절에 나타났을 뿐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한 개인이 자신의 가치관, 또는 생각, 믿음이 180도 바뀔 것이다. 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런 일은 정말 드뭅니다.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 만에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중에 행하신 기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중, 자연을 대상으로하는 기적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물을 꾸짖으면 물이 잠잠합니다. 무화과 나무를 꾸짖으면, 뿌리채 마릅니다. 자연에 행한 기적뿐만 아니라 물질에 한 기적도 즉각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사건, 즉각적이죠. 일년 뒤에 포도주가 되었다. 잔치 끝난 다음, 아무 소용없죠. 마귀에 대한 기적 즉각적입니다. 마귀를 꾸짖었는데, 내일 나갈게, 이런 내용 없습니다. 그 즉시, 병에 대한 기적, 그것도 그 즉시 낫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건,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믿음을 바꾸는 건, 즉각적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기적을 두 번 개인적으로 경험했죠. 이 기적은 어떤 유형일까요? 자연적인 것일까요? 사람에 대한 것일까요? 물론 베드로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죠.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건 즉각적인 반응이었지만, 그는 결국 예수를 부정하게 됩니다. 즉각적인 반응을 유지하지 못하고, 끝이 흐려지게 됩니다.
한 사람의 심경의 변화는 어느 순간,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분명히 있음을 우린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 여러분, 이삭을 얻은 다음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했기 때문에, 믿음이 좋아진다면, 응답하지 않으면 떠나는 거죠.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보통의 믿음에서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르게 된 전기는 이삭을 얻은 시점이 아닌, 그 어렵게 얻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시점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할례를 행하기까지는, 자기 자신의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아닌, 늦둥이, 어렵게 얻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기까지는 시간상으로 길게 잡으면, 10개월, 짧으면, 낳고난 다음이니까? 8일입니다. 이 시간 속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로 몰라보게 성숙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자는 거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창세기17장에서 명령하셨습니다. 언약의 표징으로써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현재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난 남자 아이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태어날 아이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99세에 아브라함도 할례를 행했고, 이스마엘도 13살에 양피를 베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입니다. 사실 이건 실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규정이죠. 아브라함에게 실현되지 않은건,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때는 별거로 생각하지 않았죠. 뭐 아지 있지도 않은 걸, 하나님은 굳이 하라고 그래, 이 정도, 그런데 덜컥 사라가 임신을 했습니다. 물론 이때는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죠. 그러니, 그리 크게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아들이면 큰 일나는 거죠.
지금은 의술이 좋으니까? 정말 갓난 아이도 포경수술을 합니다. 별 문제 없어요. 물론 의료분쟁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흔한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했다는 거죠. 딸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면서도, 서서히, 산달이 가까워 오면서부터, 그는 불안합니다. 참 재미있어요. 인간의 심리라는게, 해우소를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거, 참 재밌죠.
임신 기간인, 10개월 내내, 머릿 속에서 이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 자신이 할례를 받은 것과 이스마엘에 할례를 받은 건, 예외죠. 아브라함도, 이스마엘도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어여 하는데, 하나님의 명령이 뒤늦게 주었졌기 때문에, 이들은 예외 규정의 적용을 받은 겁니다. 문제는 지금 사라 뱃속에 있는 아이입니다.
10개월 내내, 아브라함은 사라가 임신을 했다는 기쁨과 함께 걱정이 함께 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아들을 얻은 다음부터 그는 좌불안석입니다. 이제 큰일 난거죠. 현실로 닥친 겁니다.
저, 이제 정말 갓 태어난, 갓난 놈에게, 여러분 같으면, 고통을 주겠습니까? 내가 저 갓난 놈의 고통을 대신 하고 싶죠. 이게 보통 부모의 심정 아닌가요? 그런데 늦둥이, 그것도 100에 얻은 아들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또 나을 수 있다면, 까짓것, 문제되지 않습니다. 딸 딸 딸 딸, 열 번째 아들, 그런데 아브라함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또 이놈을 잘 키울 수 있을지도, 또 독립할때까지 자신이 살아 있을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데 다 걱정, 근심이죠.
할례를 행하자니, 아들놈이 고통스러울 것 같고, 그렇다고 하지 않자니,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 말씀대로 아들을 얻었는데, 하나님 말씀을 거역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죠.
정말 할례를 해야 할까? 하나님이 그냥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이스마엘처럼 10여세 되면 그때하지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머릿 속에 이렇게 복잡한데도, 시간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기쁨도 잠시, 고민이 더욱 커집니다. 날이 갈 수록,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고민이 더 커집니다. 사라는 이 내막을 모릅니다. 그러니 웃고 있죠. 아마 사라는 하지 말자고 할 겁니다. 이 핏댕이에게 칼을 대, 지금이야 의술이 좋습니다. 죽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수천년전, 그때는 다르죠.
사실 할례의 고통은 이삭이 갖는거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더 아픕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말 못하는 자녀가 아프면, 여러분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가슴이 미어지죠.
아,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아, 괜히, 그때 그 말씀은 거절할껄, 괜히 약속은 해가지고, 후회 막급입니다.
그러면서 또 생각하는 거죠. 하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뭐라 하시겠는가? 아니 내가 안 하겠다는게 아니라, 조금 늦게 하겠다는건데, 뭐 봐주지 않으실까?
아니야? 해야 해. 하나님과의 약속이야?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기신 일이 없어. 내가 100살에 한 약속인데, 그걸 지키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앉아 있을때든, 서 있을때든, 이삭을 웃는 얼굴을 볼때든, 들에 일 할때든, 아브라함의 머릿 속은 복잡합니다. ‘하자, 안돼’, ‘하자 안돼’, ‘하자, 안돼’ 이러기를 수십번, 아니 수백, 수 천번, 그의 머릿 속은 복잡합니다. 이거 괜히 아들 낳았나? 없었다면, 이런 근심은 없는데, 그러니 여러분, 아들이 없을 땐 없어서 근심, 있으면 또 있어서 근심, 그런데 여러분, 없으면서 하는 근심이 나을까요? 있으면서 하는 근심이 나을까요? 행복한 근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있으면서 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은 7일까지가,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앉으면, 방긋 웃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미소 천사 어린 이삭의 얼굴이, 일어서면, 하나님과의 약속이, 들에 가면, 이삭의 얼굴이, 집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루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걸 선택해도, 후회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 절대 여러분의 지금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제단하지 마세요. 그거 뭐, 하나님이 지켜 주실텐데, 그거 뭐, 할례하는 걸 고민해, 그냥 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말은, 입장 바꿔 생각해봐, 절대 그렇게 안될 껄.
여기가 아브라함에게는 고빕니다. 이 고비를 잘 넘기면, 정말 잘 넘기면, 신앙은 쑥쑥 자라고,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그는 그저 평범한 신앙인으로 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이, 그저 평범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뭔가 독특하기를 원하십니까? 다시 말해서, 천국에서 박수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박수를 받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자, 아브라함이 무엇을 선택했는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죠. 그래요, 그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었죠.
여러분, 믿음은 갈등을 이기는 선택입니다. 부정적인 갈등을 이기는 선택입니다.
난, 여러분들이 늘 갈등을 극복하는 선택, 부정적 갈등을 믿음으로 이기는 선택, 이 탁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ag·8월,13일,창세기

恐れ入りますが、4月17日から5月08日までコメントの機能のみテストを実施します。ですので、一時的にコメント欄はご利用できません。ご了承ください。

非会員の場合は、名前/パスワードを入力してください。

[설교_2006~2007년]

リスト形式で表示 碁盤形式で表示

40:41

공유하기
[10월 29일] 창세기 21:10-14
10年前 · 442 視聴

36:16

공유하기
[10월 22일] 창세기 21:10-14
10年前 · 141 視聴

38:23

공유하기
[10월 15일] 창세기 21:10-14
10年前 · 26 視聴

13:15

공유하기
[10월 8일] 창세기 21:8-11
10年前 · 1,436 視聴

49:48

공유하기
[10월 1일] 창세기 21:8-11
10年前 · 20 視聴

41:03

공유하기
[9월 24일] 창세기 21:8-11
10年前 · 462 視聴

33:26

공유하기
[9월 17일] 창세기 21:8-14
10年前 · 416 視聴

33:43

공유하기
[9월 10일] 창세기 21:8-14
10年前 · 1,380 視聴

31:07

공유하기
[8월 27일] 창세기 21:1-7
10年前 · 351 視聴

36:43

공유하기
[8월 20일] 창세기 21:1-7
10年前 · 410 視聴

49:49

공유하기
[7월 30일] 창세기 21:1-7
10年前 · 713 視聴

55:05

공유하기
[7월 23일] 창세기 21;1-7
10年前 · 442 視聴

29:23

공유하기
[7월 16일] 창세기 21:1-7
10年前 · 2,721 視聴

36:06

공유하기
[7월 9일] 창세기 20:1-18
10年前 · 72 視聴

38:55

공유하기
[7월 2일] 믿음은 도전이다 3
10年前 · 1,492 視聴

45:41

공유하기
[6월 25일] 창세기
10年前 · 686 視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