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창세기 2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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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21:8-14

이번 주 설교 본문부터, 몇 주에 걸쳐, 저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어떤가 한번 묻을 겁니다. 그랬던 적은 없는지, 정말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정말 본이 되고 있는가? 나 때문에 혹 누군가가 하나님을 등지고, 예수를 등지고 평생을 교회 안 다니겠다고 한 적은 없는가? 아마 이걸 기억하고 있는 분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은 내 위주로 편집되기 때문에요. 내게 유리한 대로만 기억하죠.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의 기억 속에 누군가를 실족하게 한 기억은 없을 겁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죠. 소자를 실조케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 혹 이런 일을 하신 적은 없는지, 몇 번의 설교를 통해서, 깊은 묵상이 있기를 바라구요. 있다면,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기 위해서, 또 그 문제가 더 확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맛보기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매우 짧게 끝내겠죠. 오늘은 여러분들이 양해를 해 주셔야 합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경에 대한 것이구요. 두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의무에 대한 겁니다. 이건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의무,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서의 의무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에 대한 겁니다. 여러분,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텍스트죠. 성경은 믿지 않는 자에겐 아무런 느낌도 없고, 감동도 없고, 그저 책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린 아닙니다. 성경에는 감동도 있고, 기쁨도 있고, 위로도 있고, 준엄하신 심판도 있고, 약속도 있습니다. 우린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은, 믿는자 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일 뿐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마라, 그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 거지,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동성연애를 하지 마라. 이스라엘 남자중에 미동을 두지 마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 이런 것들을 두지 말라는 거지. 공동체 밖에까지 간섭하라는 건 아닙니다.
신앙공동체 밖은 별도의 세계죠. 그런데 우린 가끔 착각합니다. 단군상을 허문다든지, 교회가 사회의 동성애와 관계되는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죠. 성경의 규정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러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걸 고백하지 못하는 자들에겐, 성경의 잣대를 들이대지 마세요. 물론 우리가 이렇게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린 사회 속에 존재하죠. 우린 땅에 살죠. 따라서 사회가 부패하거나, 땅이 썩으면 우리도 영향을 받습니다. 사회가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 썩지 않기 위해, 경종을 울릴 필요는 있으나? 그걸 성경의 기준으로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의 텍스트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는거죠. 그대로 지옥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의무입니다. 의무를 말하기전, 우리에게 있는 권리부터 말합시다.
요한복음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는 말씀이 있죠.
우리에겐 하나님 아들의 권세가 있습니다. 이건 분명 우리의 권리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하지 못하면, 그건 바보죠. 또한 이 권리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침해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도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 권리 때문에 어떨 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끌려 다니십니다. 그러니 이 권리가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 분명히 아시라구요. 우리에겐,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행사하고 행사하지 못하고는 여러분의 의지와 선택이죠. 마귀하고 싸울 때, 이 권세를 행사하세요. 마귀가 일곱 길로 쫓겨나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이 권리를 행사하세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겁니다.
이 권리는 우리가 어떤 조건이 있어, 주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우린 단지,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진 공통의 권리입니다.
이 권리는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합니다. 이 권리를 그 누구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지 못합니다. 단, 권리를 갖고 있는 자가 행사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건 나도 어쩔 수 없구요.
우린 이 권세, 이 권리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권세 내 권세’, 찬양으로만 하는 것이 아닌, 우리 입술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이 권리를 잘 행사하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우리가 이야기할 믿는 자들의 의무를 잘 행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믿는 자들의 권리만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권리만 강조하면, 의무를 말하지 않으면, 균형이 잡히지 않음을 간과해 왔습니다.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따라야 합니다. 의무가 주어지면, 거기에 합당한 권리가 주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너무 한쪽에 치우쳤었죠. 의무는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만큼, 제가 이런 말하면, 그럼 목양교회는 건강하냐? 그럼 할 말없죠. 제가 적어도 이런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은,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 인간관계에 대한 의무, 인간관계에 대한 의무는 또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 공동체내에서의 인간관계, 다른 하나는 교회 공동체 밖에서의 인간관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는 십계명 중에서 4계명까지, 이건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의 의무를 잘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있다면, 구약적 표현을 빌리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 너희는 내 백성’ 이런 권세가 있다면, 하나님은 한분뿐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만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건 우리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건 우리의 의무입니다.
권리만 행사하고,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무만을 행할 것을 요구하시지도 않으시고, 권리만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이건 균형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면, 반드시 권리에 따른 의무를 행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정말 의무 권리중, 권리는 잘 말해왔고, 교인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의무중, 하나님과 관계되는 건, 너무 잘 합니다. 이게 율법이 될 정돕니다. 주일 성수를 너무 강도하다보니, 주일날 교회만 오면 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죠.
그런데 문제는 5계명 이하에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믿는 자들의 의무입니다. 이건 너무 소홀했습니다. 더욱이 교회 밖에 대한, 믿는 자들의 의무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린, 세상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세상과 등진 사람들이 아닌,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세상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교제하고, 씨름해야 할 존재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한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이게 잘 안되서, 권리는 잘 행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의무는 잘 지키면서, 사회 속에서 행해야 할 우리의 의무는 소홀히 안 결과는 교회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2005년 인구센서스 발표에 의하면, 지난 10년, 즉 1995년 인구센서스와 비교 했을 때, 한국의 기독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습니다. 불교를 비롯한 몇 몇 종교는 미미하나만 성장했구요, 천주교는 두 배 이상 성장한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이건 이 발표는 매우 충격적입니다. 한국 교회는 일천만이라고 굳세게 주장해 왔는데, 2005년 인구센서스에서 900만도 안 되는 교세입니다.
그럼 왜 천주교는 두 배로 성장했는데, 불교를 비롯한 타 종교는 성장하는데, 유독 기독교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가? 그 원인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린 이 부분에 대해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대 사회적 의무를 소홀히 한 것,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
여러분, 사실 교회보다 더 사회 봉사를 하는 종교단체는 없습니다. 물량적으로만 본다면, 불교든, 천주교든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다는 거죠.
좋은 일은 다 하는데, 교인들은 빠져 나갑니다. 아이러니죠. 있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있어서는 안되는 기적이 우린 눈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무가 무엇이냐? 이것 또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5계명 이하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특히 인간관계 속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이 여섯 계명은 당연히 먼저는 신앙공동체가 지켜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신앙공동체가 계명으로 바로서면, 그 다음은 우리의 삶의 본거지, 사회 속에서 지켜야 하는 겁니다. 신앙공동체에서는 계명을 지키면서, 사회 속에서는 안 지키면, 우리가 그래왔기 때문에, 마이너스 성장을 한 거죠.
우린 언제나 성경이야기, 우리가 텍스트로 삼고 있는 성경, 또한 본문으로 하고 있는 성경 속에서, 그 단서를 찾아야 합니다.
창세기 18장 19절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부분을 다른 성경에서는, 개역 개정판에서는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나는 아브라함을 선택했다.
창세기18장19절에서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도는 말씀, 계명이라고 할 수 있죠. 즉 계명을 지킴으로 공의를 행하라, 계명을 지킴으로 정의를 행하라.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2월에 말씀드렸죠. 공의는 어디서요. 정의는 어디서요. 공의는 교회에서, 정의는 사회에서, 즉 공의는 신앙공동체의 사회규범이어야 하구요. 정의는 신앙공동체 밖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행해야 할 규범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그리고 그의 가솔들이 반드시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라고 요구하고 계신 겁니다. 이건 우리의 의무입니다.
공의가 교회에서, 정의가 사회관계 속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논의는 사실, 정의 쪽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걸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없습니다. 공의를 잃은 자, 정의로울 수 없습니다. 정의를 외면하는 자, 공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의로우면 정의롭습니다. 공의가 깨지면, 반드시 정의는 없습니다. 이건 같이 가는 겁니다.
이 부분을 분명히 기억하시고, 창세기 21장8절 이하의 설교를 몇 번 들으셔야 합니다. 다음주부턴, 하나님의 은혜를, 무한하신 은혜를 실질적으로 받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떤 짓거리를 하는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사라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라는 분명한 생각 때문이고,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입니다. 우린 그러지 말아야죠. 사라는 모르고 그랬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린 그럴 수 없습니다.
대체 몇 번이나 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번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라와 아브라함이 잘못 선택한 결과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난 분명히, 그들에게 물을 겁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묻듯이, 당신들 왜 내 허락없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어’ 아마 뺨도 때릴 수 있습니다. 사라에게도 그럴 겁니다. 왜 이스마엘을 내 쫓았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나요? 왜 당신은 당신의 잘못된 눈에 비취진, 그 현상에 집착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똥치게 합니까? 아니 안 치워지잖아요.
이삭의 후손과 이스마엘 후손들이 지금, 지구촌에서 가장 골치 아프지 않은가요? 저는 여러분들에 유대인들에 대해 아주 잘 이야기해 왔습니다. 지지난 주까지, 유대인에 대한 글을 시리즈로 실었죠.
유대인을 잘 이야기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말하고자 한 것 뿐입니다.
중동의 문제가 곧 지구촌의 문제 아닌가요? 그 원인제공자는 바로 사라, 믿음이 없는 여인의 잘못된 선택입니다. 이걸 지금 되돌리려고 하니, 너무 간격이 멈니다.
그 부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지금의 선택이 100년 뒤,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아니 100년까지 가지도 말구요. 10년 뒤엔 어떨까요? 사라가 이 부분을 조금만 생각했다면, 별 것 아닌, 아이들의 문제로, 하나님을 골치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낳을 겁니다.
그걸 잘 분별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요. 그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죠.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 사라처럼만 하지 않으면, 절대 10년 뒤, 100년 뒤, 천년 뒤, 탈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하여금 똥 치우게는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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