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7일] 창세기 2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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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21:8-14

표를 보시죠.
지난주 설교를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우리에겐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닌, 의무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하나님은 정말 너무 사랑하세요.
하나님 사랑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무서울 정도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만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십계명중 4개는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이구요. 6개는 이웃과 관계되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당연히 공동체내에서의 관계가 먼저죠. 그리고 신앙공동체 밖의, 우리의 삶의 터전인,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과 우리는 전혀 다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민족 공동체가 신앙공동체죠. 즉 삶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삶이 신앙이고, 신앙이 곧 삶입니다. 아직도 이런 국가가 있죠.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슬람이죠. 그런데 우린, 아닙니다. 민족 공동체가 신앙공동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린 우리의 삶이 터전과 교회 공동체는 분리됩니다.
그리고 우린 본디, 하나님의 신앙 공동체가 아닌, 다시 말하면, 굴러온 돌입니다. 굴러온 돌이 마치 박힌 돌 인양 행동해서는 안 되죠.
신앙공동체가 곧 민족 공동체인 이스라엘에서, 인간관계를 규정한 율법은 하납니다. 그런데 우린 둘이어야 합니다. 먼저 신앙공동체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비신앙공동체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는 더 힘들죠. 하나님도 잘 섬겨야죠. 신앙공동체 사람들 하고도 잘 지내야죠. 또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죠. 힘듭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신앙공동체 사람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다투지 않습니다.
어딘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든 겁니다.
유독 한국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 했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 또는 교인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습니다.
이건 아니죠.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어쩌죠.
이 부분을 분명히 아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섬기시는 분들이라면, 내 이웃에게도 정말 잘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
잘 해야 한다는게, 간도 쓸개도 내 주라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도리만 잘 하면, 되는 겁니다.
믿는 자의 도리는 뭡니까? 6계명부터 10계명까지

창세기 18장17절부터 21절 사이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창세기12장의 연장선장에서 확장된 언약의 내용이구요, 두 번째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하나님과 사회적 관계에서 행해야 할 조건을 말씀하시구요. 세 번째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소돔과 고모라성읫 심판에 관한 내용은 일회적인 것이기에 우리의 관심밖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이 사는 곳을 심판한 것이라면, 우리가 좀더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성은 우리의 관심이 아닙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말씀은 아브라함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구요.
하나님의 도를 지키면, 자연스럽게 공의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의를 행하게 됩니다. 여러분, 공의, 정의를 큰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너무 클 걸로 생각해서 탈이죠. 창세기21장 8절이하에서, 공의와 정의가 결코 큰 일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신앙 공동체뿐만이 아닌, 주변 민족, 또는 인종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정체성,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키면
반드시 공동체내에서 공의를 행하게 되는 거구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의를 행하게 되는 겁니다.
이 둘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공의와 정의는 적용 대상이 다를뿐, 결국 같은 의미죠.
안에서 새는 쪽박 밖에서도 새죠. 그럼, 밖에서 새는 쪽박은, 안에서 어떨까요? 이건 안 샐 수 있습니다. 그게 은혜의 신비죠.
그래서 오늘부터는 본문 속에서 드러나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잘못된 행동들,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동들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린 믿음,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하면 되는 걸로, 착각하고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께만 잘 보이면 되는 걸로 행동했죠. 그래서, 귀하지는 않지만, 교회를 지을 때 동백나무를 밤에 몰래 쌔 베다가 교회 주변에 심죠. 정말 좋은 돌을 교회 입구에 치장을 합니다. 그게 자신의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듯이, 우리의 인간관계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간관계가 잘못되면, 결국 하나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 아세요. ‘니 아버지가 누구야?’ 아주 엄히 책망하는 투로 누군가가 내게 말하죠.
그분이 왜 그럴까요?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뭘까요? 결국 내가 공동체에서 잘못한 것은 부모를 욕보이는 아주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게 어찌보면 어린 아이들에겐 가장 큰 벌이죠.
우리의 사회적 관계가 잘못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망령되이 일컫게 하는 거죠.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겁니다.

창세기21장 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본문을 강해하기 전, 표를 다시 보시죠.
문제는 이렇게 복잡하게 얼킨 족보 때문이죠.
아브라함과 사라는 정식 부부입니다. 이들은 결혼 수십년만에, 아브라함 100세, 사라 90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죠.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父子, 아버지와 아들사이입니다. 아브라하모가 이삭 도한 父子,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스마엘과 이삭은 형제, 이복형제가 되겠습니다. 사라와 이삭은 母子, 어머니와 아들 사이죠. 그럼 사라와 이스마엘의 관계는 어떤가요? 아무런 관계가 아니죠.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관계로 본다면, 아들쯤 되겠네요. 아니, 처음에 양아들을 삼으려고 했죠. 또 이스마엘과 하갈, 하갈과 사라와의 관계로 본다면, 여종의 아들이니까? 이것도 종이죠. 복잡합니다. 여러분, 이 복잡한 관계의 원인 제공자는 누굴까요? 사라 자신입니다. 사라가 입방정만 떨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습니다. 아니 입방정을 떨었으면 책임만 졌으면 이런 문제는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 사라가 이스마엘을 양아들로 삼았다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사라부부에게 반드시 주어집니다. 그럼 문제는 이거죠.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다는 거죠. 즉 장자 아닌 장자가 될 때가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잘 풀어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꼼수를 부리지 마세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것은 취하려 하지 마세요. 꼼수는 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생각, 이제는 적어도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온지 200년 이상 되었다면,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또 우린 지난 경제개발 시대, 성공지향적인 자녀 교육에 목숨 걸었죠. 성공만 하면, 모든 게 미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인 사회,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린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자녀를 건강한 사회인, 단지 성공한 인물이 아닌,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인물이 아닌, 한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회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땀흘려 수고한 것이 아닌 경우에는 하나님께 드리지 마세요.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고, 저 또한 그 물질 공세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공동체는 어떤 경우에도 봉사직이 아닌 권력직의 직분은 없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 섬기려 하지 마세요. 내가 이 신앙 공동체의 리더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하나님의 종, 종놈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여러분이 나를 종놈으로 대하면 곤란하죠. 왜냐하면, 여러분과 나는 교회를 섬기는 동급,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이삭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모습이 있죠. 젖을 떼었다. 대충 몇 살정도 되었을까요? 서 너살, 제가 표에는 3, 4세라고 했지만, 이건 제 나름대로 생각한 거구요. 저는 좀 늦게 젖을 떼 때죠. 어머니가 가끔 그러셨어요. 많이 컸을 때, 어머니가 어딜 갔다오셨는데, 내가 집에서 울다가 어머니를 보고, 그랬답니다. ‘젖 좀 주고 가지’ 난 기억에 없습니다. 그러니 5살 이전일 겁니다. 이레는 젖을 일찍 떼었습니다. 6개월 지난 밥을 먹기 시작했으니까? 걔는 이유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자랐습니다. 하나님 은혜죠. 지금이야 의료 시설도 좋고, 의료 보험도 잘 되어있죠. 그러나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죽는 건, 정말 쉬웠습니다. 서너살까지 잘 자란 아이에게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잔치, 돌 잔치, 그래요. 일년간 건강하게 자란 것에 대한 보은이죠.
그래서 아브라함 사라부부도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했다.’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의미죠.
아마 이건,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 의미가 짚게 깔려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적어도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그는 분명 알았을 겁니다. 이삭이 서너살이 된 건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덕이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지키시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난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도 묻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씨, 이스마엘에게는 큰 잔치를 베풀어 줬소’ 이스마엘이 잘 자란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소, 기뻐했소, 은혜를 은혜로 알았소, 라구요.

여러분, 누군 태어나면서 왕후장상의 씨로 태어납니까? 그래요, 있더군요. 제가 인생 40여년을 살다보니까? 왕후장상의 씨가 있습니다. 분명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없다구요’ 그런데 여러분 사람 위에 사람 있구요. 더욱이 사람 밑에 사람있습니다. 그게 교회에도 그렇더라구요.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왕후장상도 죄인입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왕후장상이라고해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십자가 아래에선 누구나 평등합니다. 복음 안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왕후장상이 있고, 노예가 있다면, 복음의 능력을 왜곡시키는 짓입니다.
여러분, 이삭은 기분이 좋죠. 얼마나 좋습니다. 날아갈 것 같죠. 그런데 이스마엘의 기분은 어딘지 모르게 찜찜합니다. 분명 자기도 아버지의 아들인데,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아닌 이건 매우 큰 상처죠. 이 상처가 크면, 그리고 깊으면 복음은 왜곡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육신의 부모와 좋은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영적인 부모인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습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겹겹이 있는 상처로 인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삐딱하게 보는 거죠.
성경을 성경대로 읽지 못하고, 십자가를 십자가 본연의 모습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여러분, 혹 이스마엘이 이날 어딘가에 가서 눈물을 흘렸다면, 이스마엘은 하나님을 그때부터 등지기 시작할 겁니다.
아브라함이 돈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이스마엘에게는 젖을 뗀 잔치, 그걸 안했을까요?
여러분,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가 여러분을 차별한다고 느낀다면, 그건 여러분 스스로의 자작극입니다. 자격지심이죠.
이스마엘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즉 이삭이 젖을 뗀 것을 축하하는 큰 잔치를 열지도 않았는데, 꽁하니 있다면, 그건 이스마엘의 문제죠. 그런데, 지금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스마엘이 섭섭해 하거나, 상처를 입었다면, 그건 아브라함의 책임입니다.
난 여러분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헌금액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나를 대접하는 걸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교회 봉사정도에 따라 차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의 값진 댓가를 주고산 형제자매들입니다.
따라서 그런 하찮은 것들 갖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럴 순 있겠죠. 이런 차별은 있을 수 있습니다. 난 약자 편이에요. 교회에 처음 들어온 사람 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중 어떤 다툼이 있다. 그런 경우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초신자, 믿음이 연약한 사람, 편에 섭니다.
공의와 정의란 큰 게 아니라고 했죠. 그래요, 배는 다르지만, 피는 같습니다. 아니, 피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신앙공동체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그 안에선 평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차별은 없습니다.
이런걸 실천하는게 공의와 정의입니다. 약자를 좀더 배려하는 거, 그게 공의와 정의입니다.
이 놈은 약속의 자식, 저 놈은 종의 자식, 이런 편견이 한 영혼을 죽이는 것이라면, 우린 그 편견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 놈은 내 자식, 저 놈은 남의 자식, 이런 편견이 한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게 하는 것이라면, 우린 이 생각을 빨리 뜯어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차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래서 위대한 것이며, 예수의 십자가 대속은 유일한 구원의 방법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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