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창세기 21:8-11

2006-09-26 アップロード · 463 視聴

오늘은 시 한편을 읽고 감상하는 걸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가을.... 당신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낙엽 진 나무 밑 빈 의자가 생각납니다. 당신을 혼자 두고 내 달아 오던 날 당신이 많이 우셨다고 하셨지요. 당신이 뿌린 가을비를 맞으며 온 하루를 걷고... 당신으로 내 몸을 적셔가며 지난 추억을 끄집어내어 되새기며 울었습니다. 감사해서 울고, 좋아서 울고 겨워서 울었습니다. 당신이 어찌 이리 나의 모두 입니까? 당신이 있어 말 할 수 있고 당신이 있어 응석을 부리고 당신이 있어 떼도 씁니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으로 오늘 만큼은 종일토록 서성이겠습니다.” - 소 천 -

가을입니다. 여러분 가을 하늘 한번 쳐다보고 살고 있나요? 사실 요즘은 공해 때문에 청명한 가을 하늘을 쳐다보는 게 쉽지 않지만, 가을 하늘 한번쯤 쳐다 보세요.
가을은 풍성함이죠. 수확의 기쁨이 있구요. 지금이야, 그리고 우린 농경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가을은 수확의 기쁨과 풍성함이 있습니다.
혹시 가을의 맛을 잊고 지내신 분 없나요? 여유가 있어야... 라고 생각하시는 분, 오늘 예배가 끝나고 가을 하늘 한번 올려 보세요.
가을 하늘처럼 그런 설교를 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부분은 가을 하늘과는 전혀 다릅니다.

9절의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화면을 보시죠.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매우 자극적이죠. 희롱했다. 성경에서의 표현치고는 극언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이스마엘은 나쁜 놈이죠. 그래 할 짓이 없어서, 어린 동생을 희롱합니까?
희롱 그러면 부정적 의미가 강하죠. 희롱당했다. 이걸 기쁘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희롱의 사전적 의미는 이겁니다. “1. 말이나 행동으로 실없이 놀림. 2. 손아귀에 넣고 제멋대로 가지고 놂. 3. 서로 즐기며 놀리거나 놂. 4. 악기 따위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사전적 의미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느껴지는 어감은 더 나쁩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희롱이지만, 개역 개정판 성경은 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볼까요?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이 문장을 바꾸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사라가 본즉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이 부분을 오늘은 설명하게 될 겁니다. 희롱이라는 말을 놀림으로 바꾸니까? 표현이 좀 부드럽지 않나요?
사실 희롱의 사전적 의미, ‘말이나 행동으로 실없이 놀림’이나, 개역개정판의 표현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느낌은 전혀 다르다는 거죠. 희롱과 놀림.
어쨌거나, 희롱이 되었든, 놀림이 되었던, 문제는 무엇이냐면 그것이 과연 이스마엘 모자를 내쫓을 만한 사안이냐 하는 겁니다. 난 그게 아니라는 거구요. 또한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누군 구원받을 걸로 예정하고, 누군 유기, 버려질 걸로 예정했을까요? 어떤 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한 속성 중의 하나인 것처럼 말하는데요. 그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아닌, 하나님을 매우 속 좁은 쫌팽이로 만드는 거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제한 속죄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 지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또 그만한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 부분을 나는 바로 잡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중에선 단 한사람도 여러분들 때문에 신앙공동체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제가 한번 성경을 편집해 봤습니다.
우리에게 읽고 있는 성경의 내용은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입니다.
이걸 두 가지 유형, 각 세 개로 변형시켜 보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이 세 가지가 한 유형이구요.
두 번째는 첫 번째 유형에 ‘사라가 본즉’이라는 동사를 넣고 읽는 겁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의 유형으로 바꿔 보았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사라가 본즉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첫 번째 유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세 번째죠.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했다’
성경이 이렇게 표현했다면, 이스마엘은 분명 나쁜 놈입니다. 어린 동생에게 못되게 구는 거죠.
형제, 또는 자매가 있는 경우, 터울이 한 두 살 정도, 아님 그 이상까지, 형이 동생을 구박하죠. 어른들이 보지 않으면, 가만히 가서, 배를 누룹니다. 괜히 코를 찔러보죠. 살짝 밀치기도 합니다. 먹고 있는 거, 빼어도 봅니다. 아닌 척, 하면서 별짓 다 하죠.
어른들이 보면, 너무 사랑스러워요. 그런데 보지 않으면, 전혀 다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앗아가는 동생이 싫죠. 없었으면 합니다. 그럼 자기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할 걸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런 차원에서 이삭을 구박했으면, 희롱했다면, 당연히 사라로부터 따끔하게 혼이 나야합니다. 분명 몇 번에 걸쳐 혼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런다면, 더 엄한 꾸지람을 받아야죠.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에서의 내어 쫓는 건, 안됩니다. 지난주 준호가 열을 내면서, 지 동생 찬호를 혼내려고 했답니다. 노트북을 안 갖고 와서, 집에 있는 컴퓨터를 쓰려고 했는데, 찬호가 못쓰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래요, 만약 이스마엘이 이삭을 매로 다스리려고 했다면, 그건 안 되죠. 어떤 경우에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희롱이라는 말을 확대해서, 폭력을 썼다고 하더라도, 그 벌로써 한 신앙공동체에서 내어 쫓는 건 안 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라가 보지 못했을 경우를 가정해서 편집을 한 겁니다. 못 봤으니 문제될게 없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두 번째 유형이 됩니다. 사라가 그 모습을 본 거죠. 어떤 모습을 보았을까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눈에 불 납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해석이 달라집니다.
사라가 본 것은 어떤 걸까요? 사실일까요? 아닐까요? 정말 희롱한 것일까요? 희롱하는 걸로 보였을 뿐일까요? 그리고 그건 늘 있는 일일까요? 아니면 그때 한번 뿐이었을까요?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차는 열 네 살입니다.
이레가요?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동생을 놔달라고 했습니다. 한 5년전에는 그랬어요. 동생이 필요 했던것 같아요. 노면 지가 다 키운다고 했어요. 학교는? 학교 갔다와서는 자기가 다 키우겠다고, 그럴 수 있죠. 열 두 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니까?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작년에, 그랬습니다. 낳기만 나 바, 자기가 쪽 팔린 답니다.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냐고, ‘이레가 사고 쳐서 …’ 별 걱정을 다 하죠.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 차가 열 네 살…, 열 네 살이면, 놀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네 살 짜리가 여섯 살 짜리 노는데, 가면, 누가 손핼까요? 네 살 짜리가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괜히 신경질 부리죠. 큰 소리치죠. 웁니다. 그리고 이르죠. 자, 준호와 찬호, 이놈들 같이 놀 수 있을까요?
덩치도 덩치지만, 뭘 한들 형을 동생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럼 누가 답답해요. 찬호 놈이죠. 그럼 뻔합니다. 엄마한테 달려가죠. 엄마, 형이 안 놀아 줘. 형은 놀라줄려고 해도, 수준이 맞아야 하죠. 오징어 놀이를 알려주면, 그 법칙대로 해야죠. 그럼 누가 술래가 많이 될까요? 법칙을 모르는 놈입니다. 그럼 지 스스로 화가 납니다.
한번은 4살 짜리하고 가위 바위 보를 하는데요. 시작, 가위 바위 보하고 손을 펼치면, 펼치기만 하면, 지가 이겼다는 거죠. 아니야? 목사님이 이겼어. 그래도 지가 이겼답니다. 지가 바위를 내고 내가 보를 내도, 내가 이겼어. 지가 보를 내고 내가 가위를 내도 지가 이겼다고, 내가 이겼으니까? 니가 맞아. 그렇게 몇 번 하면 이내, 실증 냅니다.
보리 쌀을 하면, 자기만 보리 쌀을 하겠다는 겁니다. 좋은 건 다 자기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건, 절대 나누지 않죠. 파워 레인저, 말로는 내가 수 백번 들었지만, 내 손에 빌려 준 적은 없습니다. 만져 본 적이 없습니다. 엊그제, 야, 너 어제 아빠하고 이마트 가면, 목사님 조그만 장난감 사 준다고 했잖아. 자기는 큰 장난감을 사서 기분 좋게 놀면서, 그 말했더니, 뭔 소린지 혼자 지껄이다가, 갑작기, ‘방구쟁이’ 침을 흘리면 소리 지릅니다. 그 아이와 내가 얼마나 오래 놀 수 있을까요? 내가 모든 걸 양보하지 않은 한, 놀이는 되지 않습니다. 나는 어른이니까? 양보할 수 있죠. 그 아이의 기분을 맞춰가며, 요리할 수 있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이스마엘도 이제 십대일 뿐입니다. 넌 형이잖아, 그러면 할 말 없지만, 이스마엘도 십대, 감수성이 예민한 때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여러분 사라의 입장에서는 상종하지 못할 관계지만, 이스마엘과 이삭은 아닙니다. 이 둘 중 누가 궁할까요?
자, 서너살이면, 충분히 걷죠. 그런데 능숙하지는 못합니다. 사라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이스마엘 곁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놀아 달라는 거죠. 떼를 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재미가 없어요. 그러나 동생이기 때문에, 또 놀아주죠. 결국은 이삭 때문에 놀이가 중단됨에도 불구하고, 놀아줍니다.
이스마엘은 그 나이에 맞는 놀이 문화를 알고 있어요. 양하고 노는 것도 재미있고, 새총을 만들어 새잡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오징어 놀이하면, 해 지는 줄 모릅니다. 구슬 치기는 왜 이리도 재미있는지, 저녁 먹으라는 어머니의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죠.
팽이 놀이는요. 찍기, 겨우 좋은 거 만들어서, 의기양양하게 찍기 하자고, 해 놓고, 첫 판에 찍기 당하면, 억울하죠. 그래서 밤이면 밤마다 연습하죠. 이스마엘은 다양한 놀이 문화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게 노는 법도 알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놀이도, 규칙을 알면 금방 익숙해 집니다.
처음 한 두 번, 술래하고, 지는 거, 다음에 이기면 되지, 그럴 나입니다.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저기서 이삭이 같이 놀자고 합니다. 동생이 와서 같이 하자고 하는데, 안 할 수 없는거죠. 그런데 같이 하다보니까? 이삭이 게임의 규칙도 모르고, 망무가네 어거지만 씁니다. 그럼 여러분, 게임은 어떻게 될까요? 그때부터, 재미는 없어집니다. 같이 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떨어지죠. 그러다 보면, 늘 이스마엘과 이삭만 남습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친구들이 이삭만 오면, 그만하자고 합니다. 아니 너는 빠지라고 요구합니다. 기분 나쁘죠. 이삭만 안 오면 재미있는데, 이삭만 오면 판이 깨집니다.
그럼, 이스마엘 입장에서, 이삭한테 화 내겠습니까? 안내겠습니까? 여러분의 어릴 적 기억을 떠 올려 보시죠.
여러분, 이 둘은 형제에요.
형제의 무서움 잘 알죠. 우리 교회 아이들이 밖에 나가면, 다 형젭랍니다. 한번은 놀이터에서, 승혁이가 까불다가, 어떤 아이한테 맞을 뻔했답니다. 그래서, 상대방 아이가 주먹을 휘두르려는 찰라, 주일이가 그 아이의 손목을 잡으며, 막았다고 합니다. 마치 자기 친 동생처럼,
위기 상황에서는 동생이 아무리 자기를 귀찮게 했다 하더라도, 형 노릇합니다. 또 규칙만 잘 지키면, 이스마엘은 얼마든지 이삭과 놀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규칙을 늘 어기고, 지 고집대로 하려고 하는 이삭 때문입니다. 둘이 하는 놀이, 재미있게 하다가도, 모레에서 잘 놀다가도, 갑작기 뒤집어 엎습니다. 동생이 이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요? 한 대 때리죠. 그걸 들키면, 부모님한테 혼나는 거죠. 혼나면서도, 할 말은 다 합니다. 눈물 흘리면서도, 할 말 다하죠. 그래서 더 맞습니다. 그래도 이 놈아, 얘는 니 동생이잖아. 그럼 거기서 끝내야 합니다. 그냥 혼나고 말아야죠.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합니다. 내 너하고 노나 봐라. 그러나 다음 날, 동생이 와서 칭얼거리면, 어떻게 될까요? 또 같이 놀아야죠.
자 이런 우리의 배경을 갖고, 오늘 본문을 이해해 봅시다. 사라가 보지 않을 때, 이스마엘과 이삭의 놀이와 사라가 보았을 때 이스마엘과 이삭의 놀이, 다를까요?
이스마엘이 너무 약삽 빨라서, 사라가 보지 않으면 희롱하고, 사라가 볼 때는 때리고 그럴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보지 않을 때, 배에 올라타고, 눈 찌르고 하는 거, 그걸 당하는 놈이 말하지 못할 때, 말하게 되면, 다 말합니다. 엄마 형이 나 때렸어. 엄마 형이 나 놀렸어.
제가 너무 이스마엘 편인가요?
독일에서 공부하고 오신 교수님께서, 독일에 사실 때, 이웃에 팔레스틴 출신 친구가 살았답니다. 개인적으로 친해서 자주 오고 갔는데, 대화중에, 이스라엘 말만 나오면, 표정 자체가 바뀝답니다.
여러분, 우린 이스라엘 그러면 막내가네로 친한 척 했습니다. 아랍 그러면, 마치 그들이 우리에게 못된 짓이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죠.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이 적자인 이삭의 후손이요. 아랍은 서자인 이스마엘, 버려진 자들의 후손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해서는 아닐까요? 아니면, 아랍인들 그러면, 한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 여러분 이건 서구인들이 날조한 거죠.
제가 너무 친 이스마엘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제가 여러분의 생각을 가운데 쯤으로 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믿어주세요. 이 사람 믿어주세요.
이스마엘이라고, 이삭을 몰래 때리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 그도 나와 똑같은, 제가 초등학교때, 놀다가 동생을 때렸어요. 얼마나 쌔게 때렸는지, 정말 혼 났던 적이 있습니다.
놀다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건 다 커가는 과정이라는 거죠. 형이 동생을 때렸을 뿐입니다.
‘사라가 본즉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여러분 성경은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라고 할 수도 있는데, 굳이 사라가 본 적을 강조할까요?
그리고 그 이후 사라는 어떤 주도권을 잡고, 이스마엘을 그 공동체에서 좇아냅니다.
그래요, 사라가 보았습니다. 분명 사라가 보았습니다. 보니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합니다. 뚜껑 열리죠. 그래서, 꿀밤을 준 다음, 이삭의 손을 낚아채,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옵니다.
자, 여러분 그래요. 사라가 보았습니다. 안 보았으면 아무 일 없는데,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했으면 안되었을까요? 왜 그랬니? 내가 보니까? 이스마엘 니가 이삭을 놀리는 거 같은데, 왜 그랬니?
보자마자, 화부터 내는, 여러분 사라가 그럴 나이는 아니죠.
자신의 감정, 그래요. 이스마엘이 그러는 모습 보고, 기분 좋을리는 없죠. 그러나, 한번쯤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면 하는, 그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본문을 통해, 여러분 나죠. 이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고 싶은 걸까요? 이 본문도, 아마 여러번 하게 될 겁니다.
잘 들으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정말 천국을 소망하는 분들이라면, 땅에서 정말 잘 사십시오. 주여 주여 만 외치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주여 주여를 외치는 것 만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더욱이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먼저,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요,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그러나 그 피보다 더 가치가 있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피보다 더 진합니다.
이걸 깰만한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간관계를 더 잘 해야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교회 공동체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관계, 사회 속에서의 인간관계를 포함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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