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창세기 21:8-11

2006-10-14 アップロード · 1,437 視聴

*녹음장비의 이상으로 초반 13분 정도밖에 녹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본문 : 창21:8-14

명절 잘 보내셨죠.
창세기21장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이 본문이 단지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로 되어 있었다면, 제가 굳이 이 분문으로 믿는자들의 도덕적 행위, 윤리적 문제를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그것을 ‘사라가 보았다’라는 거죠.
난 여기서부터 어떤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린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스마엘이 못된놈, 나쁜놈이라는 거죠. 여기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을 사랑으로 대해주지 못함으로 그를 나쁜놈 만든 부분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삭을 자주, 아니 아주 빈번히 희롱한 거죠.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힘으로 대적할 수 없으니까? 어린 이삭을 대상으로 화풀이 하는 겁니다. 만약 이스마엘이 이랬다면, 그는 아주 정말 혼나야 합니다. 엄히 다스려져야 합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사라가 뭔가 잘못 본 것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잘 놀았습니다. 분명, 사라는 그랬을 겁니다. 이삭이 말귀를 알아 들을 때, 이스마엘 형과 놀지 마라, 너는 약속의 자녀고, 내 아들이니까? 종인 이스마엘과는 놀지 말라. 여러분, 그런다고 이삭을 들을까요?
이삭이 걷기 시작하고 말귀를 알아듣고,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을 때부터, 또 놀이 문화를 알게 된 때부터, 사실 이삭에게 엄마 사라보다는 형 이스마엘과 노는 게 훨씬 재미있습니다.
엄마하고는 씨름을 할 수 없습니다. 근데 어쨌든 져서 맞든 얻어터지든 상관없이, 형하고는 되죠. 그러니 자연스럽게 형에게 갑니다. 엄마하고는 달리기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빠른지, 한번 뛰면,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재미가 없죠. 그런데 형은 자기를 앞선단 말이죠.
엄마는 무등을 태워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형은 무등 태워달라고 하면, 쉽게 태워 준단 말이죠.
재밌습니다. 형하고 놀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그런데 엄마는 못 나가게 하고, 형하고 놀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엄마 낮잠 자는 시간에, 몰래 나갑니다. 그리고 형하고 놀죠. 분명 몇 번, 이삭과 이스마엘은 사라에게 혼 났을 겁니다. 더욱이 이삭은 그들의 장막에서 단단히 단속했을 겁니다. 이삭아, 이스마엘 형하고 놀지 말라니까? 이삭아 너는 이스마엘과는 격이 달라. 절대 놀지마! 엄마한테 혼난다.
그리고 이스마엘에게도 단도리를 단단히 했을 겁니다. 넌 몇 번 얘기 했니, 이삭과 놀지 말라고, 설령 이삭이 놀자고 하더라도, 넌 이삭과 놀지마. 어디 감히 종놈 주제에.
사라의 의중과 상관없이, 이스마엘과 이삭은 어울리게 됩니다. 이건 오직 이삭 때문이죠. 이스마엘은 충분히 알아 듣습니다. 그럴 나이도 되었고, 또 친엄마인 하갈에게 다시 혼나야 하기 때문에, 이스마엘은 이삭과 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게 아니죠. 분명 사라가 따끔하게 혼낼 때 듣는 거 같습니다. 그러나 아쉽죠. 그렇게 놀지 말라고 했으면, 엄마가 놀아주던가? 놀아줘도 성이 차지 않죠. 재미가 없으니까요?
품 안에 있을 땐, 놀일 아니요? 모릅니다. 재미가 뭔지 아니요. 그러나 걷기 시작하고 뛰기 시작하면 다릅니다. 그러니 이삭은 자꾸 형에게 갑니다.

두 가지 가능성, 원래 이스마엘은 나쁜 놈이다라는 거 하나, 또 하나는 사라가 잘 못 보았을 수도 있다. 저는 후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전자라 하더라도, 아무런 경쟁력 없는 모자를 공동체에서 쫓아 낸다는 건, 차라리 연자멧돌을 목에 메고 태평양에 빠지는 게 훨씬 낫다는 걸 결론적으로 말씀듭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 이기적, 내 중심적 행동 때문에 타인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다면, 그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 피해를 줄인다고, 나는 어떤 경우에도 피해를 볼 수 없다고, 타인이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사라와 같은 짓을 해서, 한 영혼이 평생 죽을 때까지 예수를 부정하는 경우, 실로 많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당신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인간 상호간의 관계 또한 중요시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그 관계는 멀리 볼 것도 없이, 가까이에 있는 사람, 가정에선, 부부, 부모자식, 신앙공동체 내에서는 믿음의 사람들간의 관계, 어찌보면 너무 가까워서 실수하고, 상처 주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그 상처로 인해, 곯아 터지면, 그땐 치료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구원시키기엔 상처가 깊습니다. 그게 혹 나로 인한 것은 아닌지, 그걸 우린 이 분문에서 확인해 봐야 하는 겁니다.
정말 희롱했을까요? 그것도 이유 없이, 물론 형이 동생을, 그것도 10여 살이나 차이나는 동생을 힘으로 제압한다면, 나쁘죠. 이유불문하고요. 그런데 만약,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또한 어떤 악의를 갖고, 그랬을까요? 저는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들, 그건 그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닌 부모세대, 우리들의 문제, 우리가 책임져야할 문제라고 확신합니다.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 그리고 당해서는 안 될 폭력을 당한 아이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억압당한 아이들, 그 아이들이 성장하면 과거 어린 시절 어른들에 의해 각인된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행하는 거죠.
만약 이스마엘이, 그런 유형이라면, 이건 절대 권력을 갖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받아야할 정당한 권리를 받지 못한 결과인 겁니다.
여러분 이스마엘도 엄연한 인격체입니다. 인격체라는 건, 그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았다는 거죠.
그게 약속의 아들이건, 약속되지 못한 아들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도, 그가 버림받아서도 안됩니다. 신앙 공동체 내에서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본문 강해를 잠시 뒤로 미루고, 사라는 왜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별 일 아닙니다. 별인 아닌 것으로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를 신앙공동체 내에서 내쫓고, 그것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등지게 했을까?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 부분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는 사라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정말 알 수 있을까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는 말, 여호와가 광대하다면, 그 광대의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요?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되어있죠. ‘이 처럼’을 우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정도가 어떨까요? 우리가 측량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만약 측량할 수 있다면, 그게 정말 이처럼이라는 말의 의미가 될까요? 또 이처럼이라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고는 있는 걸까요?
우린 정말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하는데, 그 광대는 우리 인간의 기준인 것이지, 하나님의 기준은 아니잖아요.
이런 기억없습니까? 이제 2-3세 될 아이, 아직 돈의 개념을 모르는 아이, 천원짜리와 만원짜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 만원짜리를 갖고 있는 아이에게 천원짜리를 주면 언제든지 바꿔줄 수 있는 아이, 그 아이가 아버지의 능력을 표현하는 것이, 정말 그 아버지의 능력의 전부일까요? 극히 작은 일부죠.
사라는 하나님의 사랑, 그 진정한 사랑을 모르기에, 지금 편애하는 겁니다. 얘는 내 아들, 쟤는 종의 아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이삭도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피조물이라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피조물인 겁니다. 단지, 우리는 그 형상과 모양을 회복해 가는 사람들이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잃은 상태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결코 편협하지 않습니다. 편애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독생하신 아들을 십자가에 달으셨다는 겁니다. 이 사랑을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다는 건, 우스운 거죠. 원숭이가 인간에 대해 논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하해와 같다고 하죠. 하나님은 사랑은 하해같을까요? 어린 아이들에게 너 나 사랑해, 얼마만큼, 하늘만큼 땅만큼, 그러죠. 하나님의 사랑을 하늘만큼, 땅만큼으로 제한 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알아요. 그럼 사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라 또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부분에서 2% 부족했던 겁니다.
사랑은 퍼 줄 수록, 샘솟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정말 별일 아닌, 아이들의 문제 때문에, 한 영혼을 실족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나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제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나눠주세요. 멀리서 찾지 마시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여러분이 받은 사랑을 나눠 주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사랑을 실천해 보세요.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사라는 아직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편애하지 마세요. 만약 십자가 사랑이 어떤 특정 대상을 위한 사건이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어느 특정 인종이나 계층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다른 종교에서도 가능한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편애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이 편협되고 편애하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이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두 번째로 사라가 모르는 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사라가 하나님의 용서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정말 별일 아닌 것으로 한 영혼을 실족하지 않게 했을 겁니다. 정말 못된 심보를 갖고, 어린 동생을 구박하는 이스마엘을 가슴으로 품을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한 짓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착각한 게 바로 그 일말의 양심입니다. 그 일말의 양심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잊은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 부르셨던 겁니다.
여러분, 용서의 전 단계가 뭔줄 아세요. 회개입니다.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고백 없는 용서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축복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사라는 왜 이스마엘을 용서할 수 없었을까요? 그는 그 전에 누굴 용서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자신을 누이라고 거짓말한 남편, 그 남편을 사라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용서란, 이겁니다. 상처가 났다면, 봉합하는 게 아닌, 도려내는 것, 용서란 이겁니다. 그저 가슴의 깊은 한으로 간직만 했지, 그걸 용서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건 언젠가는 반드시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가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여인의 한이 되어, 하나님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사랑으로 곡해하는 거죠. 하나님의 용서를 전혀 모르는 거죠.
가슴에 묻어 두지 마시고, 용서하세요. 다시 말씀드리는데, 하나님의 용서는 늘 처음입니다. 있었는데, 있지 않은 것으로 해 주시는 거, 그게 용서입니다.
평생, 자기 기분 나쁠 때마다, 울어 먹는 그건 용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되, 두 번 다시 기억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되, 마치 우리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인 것처럼 대해 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나 또한 누군가를 그렇게 용서해야 하는 겁니다.
더욱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용서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스마엘은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있던 자입니다. 그가 비록 약속의 자녀는 아니지만, 그는 할례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신앙 공동체, 구원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히 살던 사람입니다. 그가, 그 견고한 마귀도 감히 끊을 수 없는 구원의 사슬을 스스로 끊었다면, 그건 당연히 사라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용서와 사랑, 어느게 쉬을까요?
사랑은 할 수 있는데, 용서는 안되나요? 용서는 되는데 사랑은 안되나요?
하나님에게 있어, 사랑과 용서는 같습니다. 사랑하면 용서하는 것이고, 용서했다면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이게 같은 선상에서 있지 않으면, 그건 사랑한 것도 용서한 것도 아닙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용서하세요, 그리고 용서했다면, 처음처럼 사랑하세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러분을 대해주십니다.
지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지금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말하세요. 아니 그래요, 지금 합시다. 옆 사람에게,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을 하나님의 용서로 용서합니다.’라고 선언해 보세요. 단지 선언만이 아닌, 그렇게 해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누굴까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중을 사랑해서 그 누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장황한, 그러나 군소리가 없는 멋진 설교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정말 복음에 미쳤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미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종종, 일반 대중 앞에 서서 복음을 외칩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증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고 그는 대중을 용서합니다.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외치는 자신을 향해, 돌을 집어 던지는 사람들, 한 대 두 대, 이마에서 피가 나고, 입술을 찢어졌습니다. 돌에 한쪽 눈을 맞아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 맞을 때마다 고통을 더해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대중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웃으면서 죽어갑니다. 누굴까요? 스데반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이긴 힘, 그건 용서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그 용서, 그게 아니면 용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과 용서가 융합된 죽음을 통해, 한 영혼이 잉태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을 사랑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을 용서하세요. 하나님의 용서함으로,
한 영혼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한 영혼을 하나님 품안에서 하나님께 기쁨과 웃음을 주는 사람으로 만들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근심이 되게 하는가? 그건 여러분이 지금 하는 용서와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이며 동시에 용서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가 위대한 것이면, 그 사랑이 한 없는 것이며, 그 용서는 측량할 수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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