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창세기 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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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21:10-14

우리는 두 주에 걸쳐 하나님의 속성으로 창세기21장 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사라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사랑과 용서, 빛과 생명, 물론 이 속성들의 반대되는 것들, 무관심, 심판, 어둠, 사망 이것들은 굳이 제가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라가 사랑의 마음으로 이스마엘을 대하고 있는가? 사라가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가? 그녀에게 하나님의 속성중 중요한 것인 빛의 속성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만약 사라의 행동이 빛의 속성이라면, 아브라함이 근심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빛은 전혀 어둠을 갖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구원받은 사람인 거죠. 구원받기 전에는 어둠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었다는 개인적인 확신 또는 외적인 증거가 있다면, 이제는 빛의 속성 속에 있으려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린 빛 속에서만 살수는 없죠. 여기는 천국이 아닌, 땅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천국에, 온전한 빛의 속성 속에 들어간다면, 거기는 어둠이 없습니다. 근심 없습니다. 걱정 없습니다. 염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우린 걱정도 하고, 근심도 하고 염려도 하고, 좌절도 맛보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도 생각해 보고, 더 나아가 실제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는 땅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들죽 날죽 하는 이유는 왜 그럴까요? 여기가 땅이기에, 땅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실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90세에 아들을 보았습니다. 후무하죠. 믿음의 조상들 중에는 사라나 아브라함의 나이보다 더 먹은 다음에 후사를 얻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후에 90에 후사를 얻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늦둥이로 50이나 그 이후에 얻는 경우는 있지만, 경수가 다 끊어진 다음에 후사를 얻는다는 건, 기적입니다. 그녀 이후에 그 누구도 이런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또 하나님이 과연 어떤 때 근심하실까? 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기뻐하시는 일, 그래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려우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가 쉽지 않죠.
대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우리중 이걸 분명히 알고 있는 분 있나요? 사실 저도 가끔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건 하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 사랑을 온전히 실천할 수 없다면, 무관심으로 일관해서도 안되겠죠.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면, 나 또한 누구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을 해서는 안되겠죠.
우리가 읽는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근심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왜 근심했을까요? 정말 사라가 본 것이 사실이라면, 사라가 거짓말을 전혀 보태지 않고, 전해 준 말이 액면 그대로 사실이라면, 이스마엘이 잘못한 것이고, 사라의 말대로 이스마엘은 이삭과 기업을 함께 나눌 수 없는데, 왜 근심할까요?
그래요, 사라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니 그보다 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이스마엘을 사라의 말대로 내 좇을 수는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근심한 것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을 근심하는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근심은 제가 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할례를 받은 사람을 신앙공동체에서 내좇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자신의 명예나 재산을 잃게 했다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걸 근심합니다. 그런데 이건 아브라함만의 근심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처럼 근심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근심하지만, 뾰쪽한 대책이 없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물쩡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십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면, 그건 옳은 겁니다. 지금 내가 그걸 이해하고 있는냐? 내 기준에 적합하냐? 적합하지 않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면 항상 옳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이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어물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 문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한쪽이 손해고, 한 사람을 만족시키면, 다른 한 사람이 손해를 봐야 합니다.
사라의 말을 듣잖니 이스마엘과 하갈이 웁니다. 이스마엘을 용납하자니, 사라의 눈초리가 여사가 아닙니다.
난 분명 말씀드리는데, 하나님은 내심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설득, 아니 하나님 말씀으로 그녀를 꺽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행동은, 그녀의 말은 옳지 않기 때문이죠. 난 적어도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당신의 말도 옳아.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한번 여쭤보자.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보자. 아니면, 그래, 생각해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어. 그걸 당신이 봤어. 그런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만 했을까?
이스마엘이 형으로써, 어린 이삭을 보호한 적은 없을까? 난 당신이 그렇게 분을 내는 이유를 모르겠어. 당신이 하나님의 절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분을 내지 마, 그건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야? 당신의 지금의 말과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수 있어. 은혜받은 자가 할 도리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
우리 냉각기를 갖고 생각해 보자. 당신도 하나님께 기도해보고, 나도 기도해 보자. 그리고 좀 더 두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자.
만약 또 그런다면, 그때 내쳐도 되잖아. 어차피,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고, 이스마엘은 그렇지 않아. 불쌍하잖아.
이런 과정을 가졌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근심은 어떤 해결책도 내놓지 않습니다.
어떤 여인이 7년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그 땅을 떠납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다음 고향에 돌아왔더니, 자기의 땅을 누군가가 부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눈앞이 깜깜했겠죠. 이 여인의 잘못이라면, 선지자의 말을 믿고, 기근을 피해 고향을 등진 것 밖에 없습니다.
당신 고대사회에선 오랫동안 경작을 하지 않는 땅은 누군가 차지해도 불법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과거 자신의 땅, 지금은 누군지 모르죠. 그 주인한테 항의할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이 고향을 떠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는 거죠.
그런데 그녀는 선지자의 말, 이 땅에 기근이 있을 것이라면 말을 믿고, 떠났던 겁니다.
혹시 여러분, 선지자의 글 또는 성경을 액면 그대로 믿었는데 속은 적 있나요? 이 여인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단지 이 여인은 선지자를 믿었을 뿐입니다. 그럼 누가 해결해 줘야 할까요? 선지자가 해결해야죠.
이 여인은 과거 자신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주인과 다투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현재의 주인한테 찾아가서, ‘이거 제 건대요’ ‘당신은 누구세요. 누구 맘대로 이 땅을 경작하시죠’ 그럼 어떻게 될까요? 나는 적법하게 차지했다고, 그럼 어떻게 될까요? 머리 끄뎅이 잡아야죠. 그럼 누가 손핼까요. 생명의 삶을 잘 읽은 분은 알 겁니다.
이 여인은 왕을 찾아가 호소합니다. 현재의 주인과 다투지 않고, 왕께 찾아 갑니다. 그리고 호소합니다. 왕은 관리에게 명하여, 그 여인의 땅을 찾을 수 있게 하고, 또 7년간의 소출을 얻게 조치를 취합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엔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건 당연히 인간들이 해결해야죠. 그러나 그렇지 않은 문제도 있습니다. 또 복합적인 것들도 있구요.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난 그 키를 아브라함이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중심 잡고, 해결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근심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셔야 할 일도 없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면, 사라가 좀 손해 보겠죠.
그러나 사라가 손해를 좀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영혼이 실족하지 않는 겁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많은 것에 있어서 이삭의 후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는 것, 할례를 행하는 것, 아브라함을 믿음의 정점으로 하고 있는 것, 구약 성경을 믿고 있는 것 등, 많은 것에 있어,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른 길에서 아직 돌이키지 못하는 것은, 이 사건이 근원적인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신앙공동체의 모든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며, 그 만한 권위와 권한과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근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건 앞에서 말씀드렸던,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라는 아주 작은 기준입니다. 내가 선택한 어떤 것이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라는 생각, 절대적일 수는 없겠죠. 왜냐하면, 어떤 것을 선택해도 상대가 있기 때문에요. 그럼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게죠. 이스마엘을 신앙공동체에서 내좇는 것과 사라가 분을 삭이는 거, 과연 하나님은 어떤 것을 기뻐하실까? 여러분 답이 나오지 않나요? 이 문제는 아브라함이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그는 두 방법중 하나를 택해서 시행하면 됩니다.
인간적 방법을 택하든, 신적 방법을 찾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결과는 나는 같다고 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해서, 사라를 설득해도,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도, 그 결과는 같습니다. 이스마엘을 신앙공동체에서 내치지 마라. 이삭이 존귀한 것처럼, 이스마엘 또한 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근심만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근심만 한다는 건, 인간적 생각이 많다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이게 걸리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게 걸리고,
근심이란게 생각만 많을 뿐, 결단은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갑니다.
아브라함은 근심하시는 그 시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근심하지 말고, 첫 번째는 인간적인 해결책을 찾던가, 두 번째는 하나님께 여쭙든가? 왕하8장의 여인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심하는 시간, 여러분 근심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저 시간만 죽일 뿐입니다.
인간적 노력을 하던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메달리던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진실하게 매달리면 인간적 노력을 다 하는게 가장 좋겠죠.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이 둘을 정말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겁니다.
인간적 해결에 능한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좋다 단정할 순 없지만, 왕하8장의 이야기 구조에서는 후자가 훨씬 낫죠.
땅만 찾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덤이 따라 붙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많은 답이 성경에 있습니다.
욥의 이야기에서도 우린 우리의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근심할까요?
성경을 읽기는 읽지만, 자기화 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이 있다. 그래 그런 사람이 있다. 이 정도지, 그것이 자기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성경엔 정말 다양한 형태의 인생의 질고와 그 답이 있습니다.
실타래가 얽혔습니다. 처음엔 조금 얽히죠. 그런데 이 얽힌 걸, 두 손으로 잡고 막 흔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하는게 마치 얽힌 실을 빨리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힘껏 흔듭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할까요? 내팽겨치죠.
근심이란 그런 겁니다. 근심이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얽히죠. 복잡해 집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 오늘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사라의 모습에서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절대 근신하지 않을 것은, 사랑과 용서, 그리고 빛과 생명을 기준으로 하면 근심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니, 무조건 기뻐하실 거예요. 이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근심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근심하게 되는 거죠. 우린 어떨까요? 우린 사라로부터 자유로운가요? 결코 그렇지 못할 겁니다. 남 얘기 하지 마시구요. 여러분 개인에게 물어보세요.
또 하나는 근심은 결코 아무런 해답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현실 인식의 수준을 넘어, 근심할 시간이 있다면, 난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그 시간에 하나님께 겸손히 묻던가? 아니면 인간적 결단을 하던가? 둘 중 하나를 하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분명한 방법은 당연히 하나님께 묻는 거죠.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게 최선의 방법 아닌가요?
다행히 아브라함의 경우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그의 근심꺼리를 제거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근심꺼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을까요?
우린 여기서 열왕기하의 여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그녀의 문제에 대해, 왕은 알고 있나요? 그녀가 문제를 제기할 때까지, 즉 호소할 때까지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전능하신, 그리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왕은 여인이 호소하기 전까지, 그녀의 문제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즉 당사자와 머리끄댕기를 잡고 싸우던가? 아니면 소송의 방법으로 해결하려하지 않고, 조용히 왕께 나아가 호소합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왕께 호소합니다.
난 적어도 아브라함이 근심하면서, 도 다른 한 측면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에 걸맛는 신앙의 모습이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도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근심꺼리가 없는 인생이라면 좋겠지만, 그런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거, 그렇다면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이 있다면, 근심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호소해 볼 것을 권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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