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창세기 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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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21:10-14

아브라함의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해결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라가 정한 시한은 다가옵니다. 초조하죠. 불안하구요. 아들을 낳지 못했다면, 구박이라도 해서 무마시키겠지만, 이건 늦둥이도 아닌, 정말 기적과도 같이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약점 잡힌 거에, 더해져서 옴짝달싹 못합니다. 시간은 가고,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이때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면, 그건 옳습니다. 그게 내게 좀 손해가 될 수도 있는 개입이라 하더라도, 옳다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12, 1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오늘은 하나님이 개입하는 형태, 유형을 먼저 말씀드리고, 본문을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민할 때, 어떤 상황에 있을 때 개입하시는가? 그 유형은 대체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죠. 전 아브라함의 이야기 구조 속에선 찾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대체 몇 번 아브라함의 일에 개입하셨는가? 확인해 보니까? 표에서 보듯이, 6번 있었습니다.
1. 애굽 왕, 아비멜렉과의 관계 속에서(12장, 20장)
2. 포로가 된 롯을 구출하러 갔을 때(14장)
3.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 났을 때(16장)
4. 아브라함의 식솔들이 할례를 받았을 때(17장)
5.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19장)
6. 이삭의 출생

이 여섯 번을 놓고 보면, 1,2,3이 하나의 형태구요. 4,5,6이 하나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1,2,3과 4,5,6은 다르다는 거죠.
1, 2, 3은 불필요한 개입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굳이 개입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죠. 즉 애굽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롯을 내보내지 않고,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면, 롯이 포로가 되지 않았겠죠. 하갈과 이스마엘도, 사라의 요구대로 내쫓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개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4,5,6은 다릅니다. 이건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거죠. 그런데 할례를 받으면, 전투력 또는 노동력이 떨어집니다. 이때 외적이 쳐들어오면, 죽음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써 개입하십니다. 심판, 여러분 하나님의 직접 개입이 없는 세상 심판은 없습니다. 예수의 재림은 그 전형적인 모습이죠. 그리고 이삭의 출생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1,2,3은 인간이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 4,5,6은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자 오늘 본문은 1,2,3과 4,5,6중 어느 쪽에 속할까요?
1,2,3쪽 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결정을 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또 개입하십니다.
참, 하나님 바쁘시죠. 하시지 않아도 되는 일도 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해야 하고, 아마 하루 24시간이 부족하실 겁니다.
전 그렇게 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정확히 구분해서, 제대로 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전쟁의 신, 맘몬, 기타 등등 다른 용도로 전용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그 위치에 있으시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참 어렵죠.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린 우리의 일을 소홀히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을 바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줄로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문제에 개입하신 사건중 가장 큰 사건이라면, 크다 최고다, 이런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게 뭘까요?
그건 당연히,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단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하나의 사건이 아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땅에 오신 것부터, 그의 삶, 공생애, 십자가 고난,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림까지의 일련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라는 건, 이 모든 과정 전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만약 다른 건 다 이해할 수 있는데, 성육은 좀, 또는 부활은 그게 논리적으로, 이치적으로 있을 수 있겠어. 라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스스로 어떤 경우에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친히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인간의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부터 기획되고, 추진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용서의 극치입니다. 빛과 생명,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이 결정체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용서의 극치입니다. 십자가는 빛이며,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우리는 최소한 사랑․용서, 빛․생명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적어도 사회적 문제에, 발생하지 않으면 좋았으면 하는 문제들, 그런 문제가 있죠. 그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봐 보세요. 용서의 눈으로 보세요. 빛과 생명의 기준으로 보세요.
그러면 결코 공격, 죽여, 박살내야 해, 그런 결정은 하지 않을 겁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립니다. 용서는 빛의 속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사랑과 용서, 빛과 생명은 같다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셨는데, 그럼 인간의 어떤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개입의 성격이 뭐냐? 라는 거죠.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걸 개입하는 거냐?
여러분, 우리중,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문제 있죠.
정말 저는 이런 문제가 없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전혀 없으면, 또한 인생의 재미가 없었요.
적어도 우리가 땅에 살고 있는 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야 하는 문제는 반드시 있습니다.
선지 생도의 아내, 여러분 남편이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생활은 궁핍해도, 기뻐할 일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던,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 여인에겐, 남편의 죽음은 청천벽력입니다. 남겨진 어린 아이들과 살아야 하는 건, 둘째구요. 하나님의 종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이유 없이 죽는다는 건,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살아야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빚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여성이 남성보다 월등히 소득이 많은 업종, 직종이 있지만 농경사회에서 여인의 품삯은 형편없습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들과 살면서 빚을 지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 채권자들이, 빚 독촉하는 겁니다. 그것도 아이들을 종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여인에게 방법이 없습니다. 빚을 갚을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들을 빚 대신 줄 수도 없습니다. 또 자신의 몸을 팔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절망감을 계속 맛보는 거죠. 한고비 겨우 넘겼더니, 그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악한 자들이 날마다 찾아야 독촉을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고통이죠. 이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십니다. 겨우 한 병 남은 기름병이 기적의 원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는 사건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빚을 갚고, 넉넉하진 않지만, 타락한 사회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 뿐인가요? 수넴 여인의 사연도 있습니다. 믿음의 여인, 그러나 후사가 없었던 여인, 하나님의 종 대접하기를 즐겨했던 여인, 이 여인에게 어렵게 아들이 생겼는데, 죽었습니다. 죽음의 문제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죽음에, 죽음뿐만이 아니죠. 이 땅에 오는 것도 마찬가지죠. 즉 生과 死에 있어, 우리의 선택이나, 어떤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사는 게 상책인거 같아요.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의 죽음은 의미가 있을 겁니다.
이 여인의 문제에도 하나님은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끝인가요? 아니죠. 나아만 장군의 문제, 병 낫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해본,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해 볼 방법이 없는 그에게, 하나님은 직접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깨드리면서, 그의 문등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런 개입이라면, 참 기분 좋습니다. 하나님도, 그리고 당사자들도, 물론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땐, 고통스럽죠. 그래서 처음엔, 왜 내게 이런 일이 있는가? 불평도 해보고, 원망도 해 보죠.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죠.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 정말 긴 인생의 질고, 그 문제에 하나님은 개입하실 수 있을까요? 개입하기를 원하시죠. 그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으면 하죠. 그럼 그 이야기 구조 속으로 여러분이 직접 들어가 보세요.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개입하셨을까?
그 당시, 선지생도의 아내만 그랬는가? 수넴여인만 아들이 죽는 상황이 벌어졌는가? 나아만 장군만 문등병이었나? 다른 사람은 이런 문제 때문에 가슴 졸이고, 눈물 흘리고, 초조, 근심, 걱정, 불안해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성경은 그들의 이야기만 실고 있을까?선지생도의 아내, 수넴 여인,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 공통점을 알고 있나요?
제가 새벽 예배때, 이 본문을 이야기하면, 제목을 ‘순종 시리즈’라고 했습니다. 선지생도의 아내 이야기는 순종 시리즈 1, 수넴여인은 순종시리즈 2, 나아만 장군은 순종 시리즈 3,
이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건, 순종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사의 말, ‘기름을 부어라, 요단강에 네 몸을 담그라’ 그들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고, 그 순종의 결과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며, 문등병이 나을 수 있었습니다.
순종은 논리적 사고 체계를 부스는 겁니다. 순종은 내 선이해를 깨는 겁니다. 순종은 내 자존심을 벗어 버리는 겁니다. 내 삶의 위치를 이탈해 보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실 일이 없으면, 그 인생 참으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감사하며, 열심히 예수를 날아가면 됩니다. 예수를 날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럴 일이 살다보면 생긴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선지생도 아내, 수넴여인,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 그런 일을 당할 때, 그 말씀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거죠.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내게도 선지생도 아내와 같은, 수넴 여인과 같은, 나아만 장군과 같은 똑같은 은혜가 주어질 수 있다. 내게 있는 인생의 문제는 그들과 다를 수 있지만, 은혜는 같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겁니다.
제가 여호수아를 열심히 수요예배는 이야기할 때, 침튀기면 강조했던 거, 하나님은 우리가 여호수아처럼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할 수 있으면, 성경에 있는 내용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난 이게 믿음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인물들처럼, 성경에 있는 은혜의 사건처럼, 여러분이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는가? 그게 문제죠.
자, 그런데 오늘은 이런 기분 좋은 개입이 아닌, 좀 찜찜한 개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정말 전 찜찜합니다.
표에서도 보셨듯이,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많은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들 중에는 하나님이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제시한 어떤 기준, 또는 하나님의 속성을 조금만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는? 이런 일은 가급적 없어야죠.
난 그렇게 봅니다. 이럼에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면, 이거야 말로 은혜다. 그렇다면, 우리도 충분히 그럴 가능성,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아브라함 사라 부부가 갖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 떠 빨리, 믿음이 조상이 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되어 간다면, 순종은 여러분 결국 믿음과 관계되는 건데,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여러분이 지금 순종하지 못하는 건, 결국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이 미안하지만 부족하다는 거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엘리사가 선지생도의 아내에게 죽으라고 이렇게 하라고 했겠습니까? 저나 이 교회의 리더들이, 목회자들이 여러분에게 손해나는 일을 권하겠어요. 다 여러분 잘 되라고 하는 거죠.
고민만 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면서 제시한 것 두 갭니다. 하나는 사라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구요. 하나는 또 하나는 이스마엘은 하나님 당신이 직접 책임지시겠다는 겁니다. 결국은 아브라함이 고민하는거, 이걸 선택할 수도 없고, 저절 선택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요구도 받아들이고, 이스마엘의 문제도 해결하는 정말 멋진 답안이죠.
하나님의 이 개입을 오해하지 마세요. 사라의 요구가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이런 문제에 개입하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이 문제가 자칫 잘못하면, 신앙공동체 전체, 또는 약속의 자녀인 이삭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죠.
적어도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사라가 있는 신앙 공동체가 아닌, 다른 공동체에 있게 함으로 그를 믿음이 길에 있을 수 있게 하시려는 고육지책이죠.
결국 사라라는 여인 하나만 변화되면, 그녀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 바뀌기만 하면 되는 문제가, 정말 골치 아프게 꼬이고 꼬인거죠. 이걸 아브라함은 절대 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나서신 겁니다.
여러분 중에는 혹시 사라처럼, 자신의 생각만 조금 바꾸면, 될 문제를, 자신의 신앙의 양태를 조금만 바꾸면, 될 일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어떤 문제들을 꼬이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신앙공동체를 운영하는 기준을 창세기18장에서 분명히 제시했습니다. 공의죠. 공의는 사랑과 용서, 빛과 생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 적용되는 형태입니다.
이 기준으로, 그가 적어도 하나님의 신앙 공동체의 수장이라면, 이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야죠. 사라가 좀 불편해 할 수 있습니다. 기분도 나쁠 수 있죠. 그런데, 여러분, 사라는 이번 말고도, 앞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좇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갈에게, 이스마엘을 데리고 다시 아브라함의 신앙공동체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신앙공동체에서 분리되는 걸,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 당신이 직접, 그렇게 하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순된 행동 아닌가요? 과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이걸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아브라함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러실 수 없는 분이신데, 이걸 선택했다면, 하나님은 정말 오랫동안 고민하고 고심하셨다는 거죠.
이제 이걸 아브라함이 어떻게 오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다음 주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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