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창세기 21:14-18

2006-11-18 アップロード · 535 視聴

(창21:14)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아브라함은 앓던 이 빼내듯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그 다음 날로, 자신의 장막에서 내 좇습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에 거부입니다. 사병을 300여명을 둘 정도라면, 족장 시대에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하나님의 의도를 착각한 거 같아요. 그리고 아주 정을 띠고자 하는 의미였는지, 매우 냉정하게 내 몹니다. 겨우 지워진 것이, 떡과 물 한 가죽부대뿐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재산이 상당한데, 이건 너무 치사한 거 아닌가요. 어떻게 달랑, 이렇게 내 몰 수가 있죠.
하갈이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종 살이 한 것도, 20여 년 일 텐데, 20여 년간 쌓인 세경이 있는데, 한 밑천 줄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이 살 수 있는 정도는 돼야하지 않을까요?
아마 아브라함은 자신이 축적한 재산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 아닌, 본인의 노력, 여러분 잘 아시죠. 아브라함이 이 재산을 축적하게 된, 종자 돈이 어떻게 만들어 진건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말자, 애굽에 내려가며, 아내와 약조를 합니다. 우리 애굽에 내려가면, 위험하니까? 부부라고 하지 말고, 오누이라고 합시다. 그럼 우리가 살 수 있을거요. 거기서, 가나안의 기근을 면하고, 그리고 한 밑천 잡아 다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돌아옵시다. 아마 이들은 오누이라고 하면, 아무도 집적대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난 이것도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나이가 벌써, 아브라함은 75세가 넘었고, 사라는 65세가 넘었는데, 부부라 하들, 누가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차지하겠어요.
어쨌든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렇게 말을 맞추고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아니 그들의 예상의 반은 맞은 거죠. 애굽 왕이 사라를 취한 겁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몸값으로 많은 양의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게 됩니다”
이게 지금, 거부 아브라함의 시드머니가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거부가 되었으면, 자기 아들이 나가는데, 한 밑천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조카인 롯에게 한 거에 비하면, 형편없죠.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준, 떡과 물의 양이 며칠 친지는 알 수 없으나? 얼마 되지 않아, 떨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물도 먹지 못하고, 며칠을 견딜 수 있을지,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최소한의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은 상태와 황량한 광야에서, 모자만 살아가야 한다면, 이들이 생존 기간은 더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태가 15절과 16절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15절 16절을 읽겠습니다.
(창21:15)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창21:16)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이 본문에선 어린 자식이 굶어 죽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봐야 하는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죠.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게 어미,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죽을 상황 속에서 무얼 합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은 방성대곡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소리 내어 울었다는 거죠. 방성대곡, 소리내어 울었다. 이런 표현은 죽음을, 굶어 죽는 상황 속에서 이 모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살고자 한다면, 하지 못할 짓이 없습니다. 무슨 짓이든 합니다. 자존심도 버립니다. 살인도 서슴치 않습니다. 약탈, 그건 당연히 선택할 수 있는 겁니다. 매춘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약탈, 할 대상이 없고, 그런 능력도 없습니다. 매춘, 거긴 광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장막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죠. 그럴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존심이고 뭐고, 살기 위해 찾아 갈 수 있겠어요.
열왕기서 보면, 아들을 삶아 먹었다는 내용이 있죠.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런 상황은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우리들중,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않는 분 없죠. 뭐 하나 하려고 해도, 어찌보면, 돈 걱정 먼저 들지 않나요?자식을 삶아 먹을 수 밖에 없는 상황, 난 그들에게 그렇게 묻습니다. 그래, 그런 상황 없으면 좋겠지만, 또 원해서 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삶아 먹냐? 자식을 삶아 먹겠다는 선택을 하기 전, 왜 하나님께 부르짖을 생각은 왜 안했느냐?
엘리야의 기적, 엘리사의 기적이 수없이 많은데, 넌 왜 그들처럼 하지 않고, 자식을 삶아 먹냐? 그럴 심정으로 딴 짓을 할 생각은 왜 못하냐?
여러분, 드디어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지난 6일, 월요일 생명의 삶이죠. 성경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하17:7절이하 23절까지입니다.
7일, 화요일 생명의 삶 본문의 제목이 ‘역사의 진실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왜 기억해야 할까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 봐야 할 것은, 그걸 정죄하기 위함이 아닌, 두 번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왕하17정 13절에서 하나님은 택함받은 자손들에게 이걸 요구합니다. 첫째는 돌이켜라. 둘째는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라. 제가 두 가지를 말씀드렸지만, 이 둘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돌이켜 악할 길에서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킬 수 없고, 하나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며 악한 길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분명한 거예요. 이 둘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착각하죠. 그것도 신앙 생활 오랜 한 사람들이, 내가 술을 먹으면서도 믿음의 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담배를 피면서도, 어림없습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 물론 술 먹고 담배 피는게 악한 길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생활을 방해하는 측면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 방성대곡합니다. 글쎄요. 몇 날 며칠을 목 놓아 울었을까요?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밤, 야행성 동물들이 활동하는 밤, 이 모자는 어떤 심정으로 지냈을까요? 이런 걸 보면, 아브라함 참 나쁜 사람입니다. 사라, 정말 못된 여잡니다. 만약 하갈과 이스마엘이 하나님을 떠난 다면, 그 책임은 반드시 아브라함에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눅17:1, 2의 말씀입니다.
아주 과격한 표현이죠. 예수님 답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답지 않은 표현을 예수께서 하셨다면,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실수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가? 알 수 있는거죠.
그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실족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작은 자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럼, 누가 작은 자인가? 사라와 하갈을 놓고 보면, 당연히 하갈이 작은 자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을 놓고 보면, 이스마엘이 작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아브라함은 사라를 실족케 해야 합니다. 이삭을 실족케 해야 합니다.
그게 믿음의 가장,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자신의 장막에 남아 있게 해야 하는 거죠.
여러분, 이런 사람들이 장막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장막에 있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장막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할 수 없습니다. 안에서 새는 쪽박, 밖에서는 안 샌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방황하고, 그리고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그들은 방성대곡합니다. 방성대곡, 하갈과 이스마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방성대곡할 때, 아마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은 기쁨의 성찬을 나누고 있었을 겁니다. 깔깔 웃으며, 좋아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를 지금 지켜보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시야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은 누굴까요? 안전한 장막에서 진수성찬으로 배 채우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일까요? 광야에서 외로이 죽어가며 방성대곡하고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일까요?
17, 18절을 읽겠습니다.
(창21:17)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21:18)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이의 소리, 무슨 소릴까요? 방성대곡하는 소리죠. 방성대곡은 절대 기도하고는 상관없습니다. 그저 울었다는 거죠. 그것도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자, 하나님이 들으셨다.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이 사건부터, 하나님이 이스마엘의 상황에 직접 개입하게 되십니다.
여러분, 그럼 하나님은 듣지 않고는 하실 수 없는가? 전지전능하다며, 듣지 않고 보고는 못하는가? 그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부정적 의미의 생각을 하기 전, 성경의 기록에 집중하세요. 그래, 방성대곡하는 소리도 하나님이 들으셔, 그럼 나도 방성대곡해야겠다. 아니, 방성대곡도 들으시는데, 내 가슴에서 울어나는 기도는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출2:24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셨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권념하십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으로 출애굽에 성공하게 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현실적 상황이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 방성대곡합니다. 그런데 그걸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건, 그들의 고통스런 울부짖음, 그 상황 속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방성대곡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그 중심에 계신 분, 절망이라는 상황 그 속에 계신 하나님, 그래서 우리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끄시는 분,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런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고통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여러분의 울부짖음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여러분의 삶,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과 조건은 절망이지만,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불안케하고, 포기하게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상황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이 모든 걸, 이길 수 있는 힘, 희망입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희망이다’라는 저 글의 심오한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절망의 깊고 긴 터널에 갇혀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러분 하나님이 듣기만 하면 다냐? 듣고 묵살하면 어떻게 하냐?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의 울부짖을 듣고도 묵살할 때 있죠. 다음에 살 줄게, 지금이 너에게 그게 필요치 않아. 다음에 더 좋은 걸로 살 줄게, 그런 적 없나요? 듣는 걸로 다 가 아니죠. 들었으면 어떤 조치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의 방성대곡을 들으셨습니다. 특별히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구요. 적어도 이 문장은, 하나님의 관심은 이삭에게만이 아닌, 이스마엘에게도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갈과 이스마엘이 함께 방성대곡했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죠. ‘하나님이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해야 함에도, 어떤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건, 그 특정 인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 문장에, 여러분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문장에서 ‘그 아이의’를 대신해서 여러분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하나님이 김대균의 소리를 들으셨다’
정말 그러면, 들으면 그만인가? 들었으면 들은 결과가 있어야죠. 그래서 17절은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고’ 어떻게 하셨다구요.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자가, 누구 말을 할까요? 누가 시킨 일을 할까요? 이건 사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하는 말인데......
하나님의 사자는 다양한 존재이며, 또한 다양한 일을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간 하나님의 사자는 심판을 위해 갔죠.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간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아들 잉태에 대한 소식을 전하러 갔습니다. 여호수아 5장 말미에 나오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가나안 정벌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을 돕기 위해 갔습니다.
그럼,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무엇을 위해 왔을까요? 단지 먹을 것을 위해, 지금 배를 굶고 있으니까? 떡과 물을 주지 위해, 왔을까요?
여러분,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금 필요한 게, 뭘가요? 라면 한 상자, 쌀 20키로짜리 포대 하나,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 필요한 건, 교육입니다. 라면 한 상자가 일주일의 효과가 있는 것이면, 교육은 평생을 좌우합니다. 쌀 한포대가 한 달을 위한 것이라면, 교육은 백년대계입니다. 여러분, 라면 한 상자에 목숨걸지 마시고, 여러분의 자녀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고민하세요. 쌀 한 포대에 하나님의 자존심 팔지 마시고, 여러분의 자녀에게 믿음을 어떻게 갖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세요.
그게 여러분이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자, 고통속에서 방성대곡하고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의 사자는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방성대곡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신 건, 그들의 고통을 경감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날까요? 그렇게 믿습니까? 미안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누군가를 도와다는 성경의 기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사자 아닌가요? 매주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성경의 내용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자 이야기 그걸 믿을 수 없다면, 고백해야 할 필요는 없는 거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계획은 하나님이 하갈에게 한 하나님의 말씀 세 가지를 다 하려고 했는데, 시간 관계상 여기서 끊겠습니다. 다음주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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