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창세기 2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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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21:17-18

하갈과 이스마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의해 일방적으로 좇겨났습니다. 그건도 하루치 정도의 먹을 거리밖에 아브라함은 안겨주지 않았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는 브엘세바에서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통곡합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둘이 끌어안고 방성대곡하였다’ 여러분, 혹 여러분들도 어떤 문제 때문에 기도도 안되고, 찬양도 안되고, 머리가 하얗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방성대곡하는 것도, 배부른 짓일 수도 있죠. 어쨌든 방성대곡해 본적이 있나요? 그런 상황에 분명 놓였음에도, 방성대곡하지 못한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런 일이 정말 여러분 모두에게 전혀 없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방성대곡만 하는 모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만약 아브라함과 사라가 생각한 것처럼, 이스마엘이 정말 못된 놈이었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 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사자가 하갈에게 하신 말씀, 우린 그걸 성경을 통해 읽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여러분들중, 어떤 분은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매우 소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유일한 방법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사건이 기록된 내용을 읽는 것,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했던 사건을 기록한 내용을 읽는 것, 그 방법이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성경이 기록된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음성은 듣기 보다는 읽어야 하는 겁니다.
혹 지금, 하갈과 같은, 이스마엘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분이 있다면, 이 본문이 매우 유용할 겁니다. 또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혹 이런 일을 겪에 되면, 여러분이 이 본문의 내용을 기억하고, 읽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효과를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세기21장 17,18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 두려워 말라 !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7, 18절을 요약해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한 말씀은 다섯가지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슨 일이냐’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두려워말라’ 세 번째는 ‘나는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었다’, 네 번째는 ‘너는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다섯 번째는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섯 가지의 말씀중 핵심은 당연히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씀이죠. 저 또한 이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할 겁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나서 처음으로 한 말은 ‘무슨 일이냐?’는 겁니다. 여러분, 이 말의 어감을 알겠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에게 일어난 일 그걸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닌거죠.
이 말의 어감은 이런 겁니다. 우리가 상가 집에 가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라는 말, 여러분들도, 이런 어감의 말을 사용하신 적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건, 하갈과 이스마엘이 겪고는 고통을 함께 하겠다는 강한 의지 표명이라고 봐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내 보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정도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의도를 와전시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실제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태, 그들이 처한 삶의 정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거죠.
하나님의 사자는, 여러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보내지는 존재들입니다. 그럼, 여러분, 저 다섯 가지 중 하나님의 메시지 무엇일까요? 분명,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고통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 있는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 그 고통을 극복할 것을 원하시는 겁니다.
그럼, 지금, 이 말, ‘무슨 일이냐?’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자가 할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면,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태가, 방성대곡하는 정도 이상,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그는 나쁜 사람입니다. 충분히 도울 수 있음에도, 아니 자신의 장막에서 벗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은 것은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인거죠.
저도 가끔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무슨 일이야?’ 라고 묻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제가 그렇지 못하는 건, 나는 하나님의 메신저가 아니고, 난 단지 하나님의 메신저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는 사람이기에, 속으로만 끙끙 앓는 거죠.

두 번째 부터가 하나님이 하신 하갈에게 실질적으로 하시고자 했던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지금, 하갈은 두려운 정도 아닙니다. 사실은 그 이상이죠. 그런데 여러분, 지금 하갈에게 필요한 게, 뭘까요? 먹을 음식인가요? 먹을 물인가요? 지금 당장, 배가 고프니까? 먹을 줘야 할까요? 지금 당장, 내가 굶고 있으니, 먹을게 있으면 만족해야 할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메신저는 왜, 지금 당장 먹을 게 필요한 이 모자에게, ‘두려워 말라’는 말을 하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이 모자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전혀 모르고 계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왜, 두려워 말라고 하실까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걸 하나님께서 아시고, 하신 말씀은, ‘너희는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갈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가나안에서 쌀밥 먹고, 고기국 먹고, 배 팅겨가며 사는 것,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삶과 맛대가리 없는 만나를 먹으며, 낮에는 더위에, 밤에는 추위에 떨며, 가난하게 살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어떤게 나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전자를 선택하겠습니까? 후자를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이왕이면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걸 생각하십니까? 욕심쟁이,
사실, 하갈은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그게 아닌,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거, 자,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서의 이야기 구조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네가 어디를 가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인간의 두려움은 죽음 일 수 있지만, 지금 당장 찾아오는 어딴 문제일 수 있지만, 자, 보세요. 여호수아는 두렵습니다. 저 원망 많은 백성들이, 내 지도력을 인정할 것인지, 두렵습니다. 혹 전쟁중 패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호수아가 지도력을 발휘해서 백성들이 잘 따릅니다. 전쟁에서도 전술을 잘 짜서 승승장구합니다. 그런데, 모든게 잘 되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결국 때깔은 좋을 수 있지만, 그 영혼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 불에서 고통의 삶을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거, 우린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자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분열왕국의 초대 왕이죠. 여로보암, 그는 어찌보면 성공한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의 등극 모습은 마치 다윗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북이스라엘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부정적 기준으로 그의 이름은 성경에 너무도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눈 앞의 이익에 집착해서, 하나님을 등진 결과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 그래서 내일이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근심하거나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두려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이런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 그걸 좀 걱정하고 두려워해 보세요. 죽음의 고통이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다는거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 번째는 내가 그 아이의 고통의 소리를 들었다. 방성대곡이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든, 하나님이 들으시면, 그건 곧 문제 해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죠. 분명, 방성대곡해야 할 때임에도, 또는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불평은 많죠. 왜 하나님은 나에게만 침묵하실까? 라고 불경스럽게 생각하죠. 방성대곡을 하든, 부르짖어 기도를 하든, 해 보세요. 하지 않으면서,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시고, 우는 놈에게 젖 줍니다. 이 아주 단순한 법칙을 잊지 마세요.

네 번째는 너는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이의 고통을 들었으면, 하나님이 직접 뭔가 해 주시지, 그렇죠. 왜 기운도 없는 하갈에게 시킬까요?
하갈도 지금 죽을 맛입니다. 아마 그랬을 거예요. 물이 떨어질 때 하갈은 먹는 척만 하고 이스마엘을 멕여을 겁니다. 떡을 먹어야 할 때, 하갈은 손톱만큼만 먹고, 이스마엘이 좀더 많이 먹도록 했을 거예요. 당연한 거죠. 모정을 거스를 수 있나요. 그러나, 하갈이 먼저 지쳤을 겁니다. 그래도 어미이기 때문에, 정신력으로 버텨왔습니다.
어린 자식 놈이 고통스러워할 때, 뒤 돌아 눈물 흘립니다. 초근목피, 잡히는대로, 아들에게 먹였을 겁니다. 자신은 쫄쫄 굶어가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먹였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메신저는,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듯이, 하갈로 하여금 이스마엘을 부축하도록 요구합니다.
여러분, 이 말의 의미는 뭘까요? 이스마엘을 돌보는 건, 하갈의 책임이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돌보지 않습니다. 누가 해야 할까요? 하갈입니다. 이 말은 사실 아브라함이 들어야 할 소리입니다. 또한 여러분과 내가 들어야 할 소리구요.

다섯 번째의 말씀은 ‘(내가)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제가 강조하기 위해서, 붉은 글씨로 했습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없어도 됩니다. 다섯 번째 말씀만 있다면, 굳이, 두려워 말라는 말 필요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그 아이의 고통 소리를 들었다. 이 말없어도, 됩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표를 만들어 봤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메신저가 하갈에게 처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먼저 했었어요.
사라가 제기한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하시면서, 이삭만이 너의 약속의 자녀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 또한 너의 아들이다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하갈에게 반복하고 있다는 거죠. 창세기21장 13절을 말씀드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말을 이스마엘에게 하라고, 그런 의도를 갖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는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또 하실까요? 사실 이건, 한 말 또 하는 거죠. 여러분은 기분 나쁘죠, 한 말 또하고, 한 말 또하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매우 기분 나쁘죠.
어떤 사람이 필요에 의해서, 술을 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주를 하려는 거죠. 그런데 술 자를 계속 있습니다. 피할 수 있는 술자리가 있고, 피할 수 없는 술자리가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피할 수 없는 자리에만 가는데, 한번은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자기는 맨정신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한 말 또 하고, 또 한말 또 하고, 귀찮을 정도로, 한 말을 계속하더랍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는데, 갑작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는 거예요. 혹시, 내가 옛날이 그런거 아니야? 그리고 나서는 바로 술을 끊었답니다.
자, 분명,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말씀을 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스마엘에게 하시지 않은 이유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그 말을 전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메신저가 지금 다시 하고 있다는 거죠. 결론은 뭘까요? 아브라함이 하지 않았다는 거죠.
자, 여러분, 나는 정상적인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갈도 그렇게 생각해야죠. 이스마엘도 마찬가지구요.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해 들었다면, 방성대곡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왜, 하나님이 한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죠.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도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한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구요.
그렇다면, 그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면, 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갈등은 있죠. 시기적인 초조함 당연히 있죠. 우리 아이들이 잘하는 찬양 뭔줄 아세요. 한번은 승혁이가 그 찬양해서 유치원 선생임이 감동 먹었다구 하던데, 그 찬양 한 가운데에 이런 가사가 있죠. ‘두렵지 않네, 무섭지 않네 그 분 따라 가려네’
난, 여러분들이 네 살짜리 정도의 믿음만 있어도 두려워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걱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네 살짜리가 뭘 알겠어요. 어미가 가르치고, 교회에서 선물주면서 하라고 하니까? 하는거지, 걔들이 어떤 의식이나, 확신을 갖고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얘요. 한 달만 절 갈에 집어 넣어 보세요. 독경합니다.
가르쳐야 할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씹었습니다. 그리고 지들은 호의호식합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조하는 거, 있죠. 성경을 그냥 읽지 말고, 누군가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읽어라. 그 말은 어디에 포인트가 있는 건가요. 가르침이죠.
하나님의 메신저가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과, 하갈에게 한 말씀의 차이는 뭔가요?
먼저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는 ‘내가’라는 주어가 있는데, 하갈에게 하신 말씀에는 없죠. 여러분이 아이에게, 오늘 이 마트에 가서, 파워 레인저 사줄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그럼 누가 사주는 건가요. 옆집 아저씨가 사 주는 건가요. 아니요. 내가 사 주는 겁니다.
또 다른 건 뭔가요? ‘한 민족’이, ‘큰 민족’으로 바뀌었죠. ‘한 민족’과 ‘큰 민족’ 큰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는 말씀의 구조로 보면, 똑같죠.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나, 하갈에게 하는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의중은 구조가 똑같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이 내 약속의 씨는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그를 축복할 것이다. 그 또한 나의 복된 자녀이다. 이게 하나님의 심오하고 깊으신 심중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한 민족'이 되도록 하시겠다고 했고, 하갈에게는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차이를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비교하면, 그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건, 직접 약속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직접 주고 받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간접입니다. 이스마엘이 직접 들은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들어서 전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전해 주고 안 주고는 아브라함의 영역이죠. 어쨌든 하나님은 이스마엘에 대한 당신의 심중을 아브라함에게 먼저 밝히고, 그리고 그 말을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할 걸로 굳게 확신하셨습니다.
직접이냐? 간접이냐? 그 차인데요. 이 차이는 백짓장 만큼의 차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메신저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는 것과 성경을 통해 내가 깨닫는 것,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지 말고, 성경을 정기적으로 정독하는게 훨씬 낫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비교입니다.
먼저는 명령과 조건에 대한 비교죠.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말씀 전에, 명령이 있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에게는 없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말하려는 부분이 아니기에, 넘어 가겠습니다. 약속의 부분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스마엘처럼 한 가지만 약속하신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핵심은 같다는 거죠.
창세기12장 2절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떠난 아브라함은 순간적 믿음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은 ‘한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게 아닌,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하갈에게 하나남의 메신저로부터 전해집니다.
이렇게 보니까? '한 민족‘과 ’큰 민족‘은 다르죠.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처럼, 축복해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표명입니다.
밑 줄 치세요.
그리고, 그 말씀을 부여 잡고, 이게 내 말씀이다라고 선포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도,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좇겨나,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이스마엘을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 여러분, 이스마엘 이름을 지우고, 여러분의 이름을 한번 넣어 보세요.
난, 여러분들도 충분히 그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금 당장 타워 펠리스에 살지 않는다고, 지금 당장 뭔가 부족하다고, 정말 뭔가 불평 불만에 가득한 사람처럼 부정적으로 살지 마시고, 내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처럼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성취해 주신 것처럼 나에게 충분하다는 확신을 가지세요.
지금, 창세기21장에 보여지는 아브라함이라면, 여러분은 백배 더 그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큰 민족의 조상이 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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