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창세기 21:20-21

2007-01-06 アップロード · 614 視聴

오늘은 2006년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 마지막 설교를 ‘자녀 교육’과 관계된 내용으로 하게 되어 매우 의미가 남다릅니다.
지난주에는 좀 자극적이고 우울한 말씀을 드렸는데요, 난 단지 여러분의 자녀를, 또는 여러분을 축복받은 사람, 성공한 사람, 예수 믿어 성공했다. 예수 믿어 축복받았다, 그러기 위해, 자극적인 언어를 써가며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하나님의 사람’ 적어도 자신의 분야에서, 사회와 교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갈 믿음의 사람을 양육하기 위해, 조금은 자극적인, 아니 심히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뿐입니다.

제가 몇 주째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첫 번째 이유가, 성경에 분명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는가? 하는 겁니다.
기억하시나요? 하나님이 하나님께 하시면, 항구적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 생명 있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 쌍방간의 선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런데 분명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다라고 기록되었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장성했고, 그가 광야에서 활쏘는 자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이 전부라는 거죠.
여러분 이스마엘에 대한 내용은 여기가 끝입니다. 제가 설교로 본문을 삼을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읽고 지나는 갑니다. 그것뿐이면 다행인데, 이스마엘이라는 이름, 그건 믿음의 사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함께 한 결과가 이렇게 끝이 날 수 있는가?
어떻게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가? 그게 제가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 아니 하갈의 이야기를 길게 끌고 온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항구적, 생명있는, 쌍방간의 결과가 있어야 하는 원칙을 깬 장본인은 누군가? 물론 그걸 캐서 책임을 물을 순 없습니다. 제가 이걸 말하는 건,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 성경은 분면, ‘하갈이 이스마엘을 위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이스마엘을 위한 것인지, 하갈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어미가 자녀를 위하는 마음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말 하갈이 이스마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했다면,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은 사람인데, 이삭보다 먼저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인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을까? 정말 ‘그 위함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두 번째 제가 이스마엘과 하갈의 이야기를 몇 주째 하는 겁니다.
난 확신하건데, 정말 하갈이 이스마엘을 위함이 있었다면, 신앙 안에서 그를 경쟁력 있게 키웠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갈이 정말 이스마엘을 위함이 있었다면, 예언이 성취되는 방향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그를 인도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의 감정을, 사라와 아브라함에 대한 감정을 죽여야죠.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죽이지 않는 한, 이스마엘은 하갈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전, 어떤 경우에도 이스마엘에겐, 너 왜 믿음에서 떠났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건 그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 책임은 당연히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이 공동으로 져야 합니다.
자녀가 잘못되는 건, 모두가 성인들의 책임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했다가 전명심 전도사님한테 혼난 적 있습니다.
무 방송에서 하는 SOS 24시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보시는 분, 있을 거예요. 그걸 보다가, 자녀 학대하는 내용이었는데, 하도 열 받아서 순간적으로 ‘싸지른다고 다 부모는 아니지’ 이 표현을 쓰고 곤혹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난 하갈에게 그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분명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는 아닙니다.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해서, 막 내팽겨쳐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약속의 자녀만 아닌거죠.
아브라함의 씨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함께 양육할 수 없다면, 적어도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을 짊어지우고 광야로 내 몰아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엘에게 돌아가야 할, 그의 몫, 그게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는 아니죠. 무책임한 겁니다.

이런 상황, 사실은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에게는 위기입니다. 단지 먹고 사는 위기만이 아닌, 정말 이스마엘과 관계되는 창세기16장의 예언이 성취될 수 있는 매우 절호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아니, 그것조차도 배부른, 부정적 예언이 성취되기 전, 그들은 굶어 죽을 수 있습니다. 위기죠.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위기,
이들의 절망적인 상황 속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창세기16장에서 이스마엘에 대해 부정적인 예언을 하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은 변개하시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그 예언대로 돼야 합니다. 만약 하갈과 이스마엘이 굶어 죽게 된다면, 예언보다 더 나쁜거죠. 예언은 그래도 오래 삽니다. 부정적이지만, 그 나름대로 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굳이, 이 모자의 삶에 개입하셔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 속으로 찾아오셨다는 것은, 이제 그 예언은 물 건너갔다는 의미입니다.
예언은 미래부터 유효한 거지만, 하나님의 언약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건, 오늘부터 유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래도 오늘처럼 한다면, 영원히 부정적 미래는 없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예언을 밀고 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갈이 지혜로운, 그리고 믿음의 여인이었다면, 자신의 절망 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그 의미를 분명히 알았을 겁니다.
아 하나님께서, 내 아들 이스마엘의 미래를 책임지시겠다는 거구나. 내 아들의 미래가 부정적이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걸 깨셨구나.
아브라함의 집에 있을 땐, 사실 창세기16장의 예언이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어찌됐든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은혜만 있으면, 먹고 사는데 문제 없고, 16장의 예언처럼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쫓겨나면서부터는 그 예언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도 떨어졌습니다.

창세기16장의 이스마엘에 대한 예언은 조심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거나, 피한다고 피해지는 그런게 아닙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게 운세와 하나님의 예언과 다른거죠.
인간의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부정적 예언을 깰 수 있는 건, 예언을 한 당사자뿐입니다. 여러분 그분이 누굴까요? 바로 하나님 당신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이 한 말을 뒤엎고, 이스마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함으로, 내 스스로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걸, 몸으로 막겠다. 하나님이 절망적인 이스마엘의 삶에 찾아오셨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성육신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절망 속에 고통하는 인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절망하며 고통스러워 하지만, 스스로 어찌할바 없는, 인간을 위해, 대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예수 그 이름입니다.
인간은 노력해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고통하며 절망 속에 울부짖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인간의 모든 짐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몸으로 막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인 겁니다. 영적인 희망일 뿐만 아니라, 육적인 희망이라는 거죠.
예수를 만난 사람들, 그들은 인생의 문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건 영적인 문제만은 아니죠.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그들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죠.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희망이 보이나요. 여러분의 눈에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떨까요?
지난주 아이들이 한 짧은 찬양과 율동, 보셨죠.
보기 어떻든가요? 전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딴 짓을 해도, 아이들을 보면, 전 즐겁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아이들은 교회에 일주일에 한 번 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러분과 생활합니다.
아이들이 일주일 한번 교회 전도사나 선생님으로부터 찬양으로 배우고, 넌 하나님의 자녀야. 두렵지 않아 무섭지 않아. 그런데 집에 가면 상황이 180도 달라지죠. 보고 듣는 게 다릅니다. 별의 별 짓을 다보죠. 아이들이, 그 이상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제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의 말, ‘목사님, 난 행복하지 않아요’ 여러분 아세요. 10살이 돼야, 추상적인 언어 감각이 생긴답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이상한데, ‘행복하지 않아요’
‘목사님은, 널 제일 좋아 해’ 그 말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여러분이 혹, 하갈은 아닌지, 하갈처럼, 이스마엘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 좀 했으면 합니다.

여러분, 2006년 마지막 ‘생명의 삶’ 본문은 ‘잠언’ 17장부터 31장까지입니다.
왜 잠언이 마지막일까? ‘생명의 삶’을 하시는 분들, 한번 생각해 보셨나요?
생명의 삶을 할 땐, 그날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시구요. 그리고 당해연도 생명의 삶 본문의 흐름을 유심있게 체크해 보세요.
왜, 1월에는 요한복음을, 왜 7, 8월에는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을, 9,10월에는 느헤미야와 열왕기하를, 그리고 12월에는 잠언일까?
이런 흐름을 잘 읽으시면, 은혜는 더욱 큽니다.
일년치를 다 할 수는 없고, 여러분, 12월, 2006년 마지막 달 12월, 왜 잠언일까? 여러분은 잠언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시나요? 특별히 17장이하에서, 어느 부분에 관심이 집중되던가요?
왜 잠언일까? 잠언의 저자들은 왜 후세대 젊은층에게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가?
잠언의 형식은 ‘아들들아 들으라’‘자녀들아 들으라’라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아들, 자녀는 직접적으로 아들 자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후세대를 지칭한다고 보면 됩니다. 동네 어르신이, 동네 아이들에게 하는 말씀,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저는 잠언을 이렇게 분류합니다. 이렇게만 한다는 건 아니구요. 이렇게도 분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잠언 분류Ⅰ
1. 너희는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지 말라   14:26,27
2. 너희는 무엇보다도 지혜와 명철을 구하라    3:13
3. 너희는 선(善)을 행하라    3:27, 11:25, 14:31, 17:5, 21:13

성경에 보면, 자녀 교육의 원칙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성경이 있습니다. 신명기 모세의 설교에서와 사도바울의 글을 통해, 우리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지, 배웠으면 합니다.
신명기 6장 6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1. 네 마음에 새겨라. 네가 먼저 읽으라
2. 네 자녀에게 가르쳐라. 부지런히 가르치라
3. 선포하라.
4. 생활화하라. 종교적인 활동이 아닌 삶이어야 한다는 거죠.

유대인의 자녀교육은 종교, 신앙교육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기위해, 히브리어를 배워야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한국에서 태어났어도, 한국의 한글은 몰라도 히브리어는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에겐 세대간의 세대차가 없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을 같이 읽고, 성경속의 역사를 같이 생활화하기 때문입니다.
절기가 되면, 할아버지, 손자를 막론하고, 그 절기에 따른 음식과 복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자녀 교육이 무서운 것이구요. 전 세계 5%의 인구가 지구를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겁니다.

또 하나는 에베소서 6장4절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1.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2.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은 신명기로 대신해도 무방합니다. 그럼, 여러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자 말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아비들이 어떻게 하길래 자녀들이 노여움을 품고, 발산할까요? 사실 노여움은 얘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죠. 어르신들에 해당되는 거 아닙니까?
이 단어의 의미는 사전적으로 “1. 성나게 하다, 격분시키다 《against, at, by》, 2. 화나게 하여 …하게 하다(provoke) 《to》, 3. 《드물게》 <감정·병 등을> 악화시키다”
이렀습니다.
노엽게 하다는 말보단 낫죠.
대체 아비들아 어떻게 하길래, 아이들이 성나게 하고, 격분시키고, 하나게 하여 …하게 할까요?
이건 성내다, 또는 격분하다. 화내다, 라는 의미하고는 다르죠.
그 원인이 다 아비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아비들은, 단지 아버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아이들의 전 세대를 의미한다고 보면 되구요. 좁게는 부모를 의미합니다.
‘노엽게 하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노여워 하던가요? 경험있으신분 있나요? 거꾸로,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여러분이 노여워하시나요? 아이들이 가만히 있는데, 괜히 노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한강에서 뺨맞고, 자녀에게 풀어본 적은 없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가정생활의 기준을 말하면서, 부부간에 어떻게 해야 가정이 화목하냐? 부모 자식간에는 어떻게 해라, 그러면서, 아비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마라, 고 했단 말이죠.
여러분, 분, 화와 관련 있을까요?, 아 이놈이 지 승질난다고, 노엽움을 피면, 더 열 받습니다.
안 그래도, 주체할 수 없는 열을, 폭발합니다.

전 이렇게 봅니다. ‘자아 정체성의 혼란’ ‘자존감의 상실’
이런 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아’‘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난 저주받은 인생이야’
자신을 죽이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음으로, 아브라함의 서자라는 가슴앓이, 그걸 ‘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마귀의 권능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권세와 능력이 있는 ‘하나님 자녀’라는 분명한 믿음을 심어 줍시다.
이런 아이라면, 자신의 상황을, 절망적인 상황을 헤쳐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라구요. 우리는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타워팰리스 근처에 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린 택하시고, 기름부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걸 우리의 자녀에게 보여주고 가르칩시다. 하나님은 너를 택하셨다. 넌 할 수 있어, 하나님이 너를 기름부으셨다. 넌 할 수 있어.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넌 할 수 있어.
여러분, 내가 이레에게 이 말들, ‘하나님은 너를 택하셨어. 하나님은 너에게 기름부으셨어. 하나님은 너와 함께 하셔’ 다른 표현으로 하면, 뭔줄 아세요. 지난주에 했던, ‘그래 그럼 집 나가’
교회와 관계되는 것, 신앙과 관계되는 것, 믿음과 관계되는 것, 그건 단호합니다. 용서하지 않죠.
이건, 또 이런 의미죠, 나는 너에게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난 무능력자다. 그러나 내가 믿는 하나님은 너에게 충분히, 능력자가 되신다. 축복자가 되신다. 나는 무능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무능을 채우고도 남은 능력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라, 오직 하나님을 믿으라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름을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에게도 기름을 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하고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기쁨이되고, 평화하는 힘이 될 겁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 아이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믿음, 하나님이 나에게 기름 부으셨다는 믿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건 그 노여움을 제거하고도 남은 힘, 기쁨, 희망이 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우리의 자녀에게 두 날개를 달아줍시다.
한 날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는 겁니다. 또 하나는 뭘까요? ‘그를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좌측 날개입니다.
그리고 하갈이 그를 위함. 모정은 우측 날개입니다.
여러분 좌 우측 날개가 조화를 이루면, 높이 납니다. 멋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조화되지 못하고, 삐꺼덕 거리면, 파닥 거리다 마는 날지 못하는 새가 되겠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한 날개,
하갈이 그를 위함이 한 날개, 그래서 좌우 날개가 되어 이스마엘이 고공 비행, 저 창공을 마음껏 나는 자신의 꿈과 이상, 또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품고 높이 멀리 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tag·12월,31일,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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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말
2007.07.13 11:31共感(0)  |  お届け
기도하겠습니다.삭제
목양교회
2007.01.14 07:41共感(0)  |  お届け
그냥 설교란 말 뜻을 모르겠어요.삭제
뭐지
2007.01.14 04:59共感(0)  |  お届け
뭐지여...그냥 설교인가요?삭제

[설교_2006~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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