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4일]창세기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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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금 열심히 믿음,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없이, 정말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믿음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전 그 기준으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확신을 하고,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해 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전혀 다른 종자가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성경은, 특히 신약성경은 그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경은 마치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성경에서는 ‘믿음’을, 어떤 성경에서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치 믿음과 행위가 다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과 행위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되는 믿음이며, 우리의 행위는 대부분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중 많은 부분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하나님의 부르심, 두 번째는 창세기21장 이삭을 잉태하는 부분, 마지막은 창세기22장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부분입니다. 신약성경은 모두, 이 세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2장의 믿음을 말하고 있는 신약의 본문은 창세기12장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21장은 21장의 전후 맥락에서, 22장은 전체 12장부터 21장,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는 그 순간까지의 전체 내용을 갖고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당연히 22장이 되겠습니다. 창세기12장도 22장을 위해, 21장 22장을 위해, 아브라함의 신앙의 여정은 모두 이 창세기22장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12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신약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브리서11장 8절의 말씀입니다. 그래요. 이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탁월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며, 미지의 땅, 어딘지 구체적으로 지정되지도 않은 땅을 향해, 그 나이에 떠난다는 건,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 믿음을 잘 관리했으면, 좋았으려만 그는 그러지 못했죠. 기근을 맞아 가서는 안 되는 애굽까지 갔고, 거짓말을 하고, 조카 롯을 구한다면 명목으로 무모한 짓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분명함에도, 자신이 종을 후사로 삼겠다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분명 그의 믿음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다.
떠나 믿음과 떠난 다음의 믿음이 다르다는 거죠. 이건 우리가 달라 평가해야 합니다. 하나의 점으로써 창세기12장의 믿음은 탁월하지만, 연속적인 관계 속에서 본다면 그의 믿음은 굴곡이 심합니다. 부침이 너무 심하다는 거죠. 여러분은 어떤가요?
롬4:18절은 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으니’라구요.
그리고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라고 19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에서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믿음을 잘 유지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20여년 만에 얻은 아들, 그 귀한 아들 때문에 편애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이스마엘을 쫓아냅니다. 그의 믿음이 현실적 조건 때문에 다시 흔들렸다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인도하심으로 겨우 믿음을 회복하고, 평화를 선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22장입니다. 히브리서11장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클라이맥스죠.
여러분들중, 어떤 분은 첫 번째 단계에 이르지 못한 분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첫 번째 단계에서 헤메는 분도 있구요. 두 번째 단계에 이른 분도 있을 겁니다. 또 어떤 분은 두 번째 단계에 이르렀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분도 있을 겁니다. 3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3번째 단계는 우리 모두가 이르러야 할 단계입니다. 반드시, 난 여러분들을 이 3번째 단계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일일이 다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그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과 환경이, 아브라함의 시대와 너무나 다르죠. 그래서 제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절 ‘얼마나 잘 활용하시는냐?’에 따라, 여러분의 믿음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아브라함도 많은 믿음의 사람처럼, 2단계에서 머물 뻔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2단계를 넘어 3단계에 이르게 된 결정적 계지는 여러분 말씀드렸지만, 창세기22장 1절에 있는 ‘그 일’입니다.
대체 그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우린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가 경험했던 엄연한 사실이었던 ‘그 일’은 그를 평범한 믿음의 사람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일’ 이후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험을 잘 통과하였고, 시험을 잘 통과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였고, 범사에 복을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분명히 지키셨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조상이 됩시다. 우리의 경쟁력은 ‘믿음’인데, 여러분 평범한 믿음은 결코 우리의 경쟁력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경쟁력이라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린 적어도 3번째 단계의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경쟁력이 됩니다.

여러분 제가 창세기 22장에선, 이 말씀만 할 겁니다. 창세기22장 2절의 말씀, 창세기22장에선 2절의 말씀을 하면 할게 없어요. 그리고 23장입니다.
그런데 22장 2절의 말씀을 하려면 사전 작업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다른 사전 작업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을 아담과 아브라함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맛뵈기 말씀을 드렸었는데, 기억하시나요.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아담과 아브라함, 하나님이 부르시고, 응답하는 구조 속에서만 비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우리에겐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저기서 구조를 찾아보고, 만들어보고, 비교해 보는 겁니다.
아담은 첫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첫 번째 믿음의 조상입니다. 매우 상징적 존재들이죠. 그래서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고,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잘못된 것은 버리고, 잘 한 것은 받아들이자는 의도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고, 또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은, 과연 아담형인지, 아브라함형인지, 혹시 정말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인지, 결론적으로 아담형이라면, 믿음이 점점 옅어지거나 믿음이 약해지는 형이구요. 아브라함 형이라면, 믿음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럼 결론은 나온거죠. 우린 누굴따라야 할까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부르시기전, 두 사람은 다른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아담은 창세기3장에서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뱀의 말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요. 아비멜렉과 전쟁까지 갈 수 있는 상황,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와 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
한 사람은 뱀과 놀아났고, 한 사람은 하늘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부르시죠. ‘아담아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라구요. ‘아담아 어디 있느냐?’ 나 ‘아브라함’는 다르지 않습니다. ‘아담아 어디있느냐?’를 줄이면 ‘아담!’ 아닌가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있죠. 하나님께서 아담이 숨은 걸 모르시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건 아닙니다. 그저, 아담을 부르실 때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거고,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라브라함’ 그의 이름만을 부르신 겁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의 반응이죠. 아담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했습니다. 창세기 3장10절입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대답은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은 하고 있지만, 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벗고 있던 자가, 이제 와서 벗은 게 두려워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결국, 해서는 안되는 짓을 한 사람의 모습이죠.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정말, 정말 큰 축복 둘은, 다름아닌, 하늘의 지혜와 거룩함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10장16절이죠.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2007년 우리 교회 표어입니다.
하늘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우린 어떤 경우에도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보조자로서 그 직무를 다 할 수 없습니다. 또한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선, 거룩해야 합니다. 아담은 어찌보면, 뱀과 교제함으로 땅의 지혜는 얻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잃은 건, 거룩함입니다. 소탐대실이죠.
그가 거룩함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님의 음성 자체가 두려웠던 겁니다. 벗어서 두려운 건 아닙니다. 거룩함의 상실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게 만든 요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있죠.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아담을 징계하실 목적으로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담, 제 발이 저린거죠.
그런데 아브라함의 응답은 당당합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그러나, 힘이 있습니다. 아담은 죄인이고, 아브라함은 죄인인 아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대답엔 힘이 있고, 아담은 그렇지 않을까요? 아니죠. 아담도 아브라함도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을 놓고 보면, 아담의 상태는 불안 공포, 초조, 어둠과 관계된 상태입니다. 거룩이 상실된 상태의 모습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음을 회복함으로 거룩함을 회복해 가고 있는 중에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작은 차이가 결국 큰 결과를 낳게 되는 거죠.
아담은 거의 완벽한 조건 속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에겐 접시물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그것도 허용하시지 않았지만, 그가 뱀의 유혹을 받는 순간, 어디선가 접시물이 떨어지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접시 물에 박혀 죽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완벽한 조건 속에서 불순종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죠. 오직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불순종의 일이 벌어진 겁니다. 기적이죠. 그런데 더 큰 기적은,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한 것, 그건 더 큰 기적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믿음이 된 겁니다.
그럼, 여러분 우린 어떨까요? 우린 아브라함의 시대보다 더 악하고,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린 죄에 노출되어 있는 거죠.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게 된다면, 여러분 우린 아브라함보다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거죠. 더 나쁜 조건 속에서, 동일한 믿음을 보였다면, 그건 더 좋은 믿음 아닌가요?
하나님께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곳까지, 우리의 힘과 능력과 의지로 가게 된다면, 그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로 우리 들어 옮겨 놓으시게 될 겁니다. 그곳까지 가는 거,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는 게, 그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요?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의 정도에 맞는 시험을 하실 겁니다. 난 여러분 모두가 당당히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하려면, 믿음의 분량에 맞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열매가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겐 있어서는, ‘평화’였습니다.
난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 크고도 놀라운 뜻을 땅에 펼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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