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1일]창세기22:1-2

2007-02-17 アップロード · 172 視聴

지난주에 설명했던, 이 부분은 충분히 이해하셨죠.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하란 땅을 떠난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가 믿음의 후손인 우리의 지향점은 아닙니다. 창세기12장은 남다르지만,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음을 잃지 않고 이삭을 기다린 것도 정말 탁월합니다. 이 부분도 아무나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창21장의 아브라함의 믿음도 우리의 지향점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분적으로 나누어서 상세히 말씀드리느냐하면, 우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가시적으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의 믿음을 가시적으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기준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많은 현상들을 우린 믿음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거죠.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제가 이 말씀을 드렸다고, 정말 헌금은 믿음의 요소는 아닌가 보다. 라고 생각하면, 그때는 내가 시험에 들죠.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헌금액수가 곧 그 사람의 믿음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의 햇수가 그 사람의 믿음이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런데 우린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믿음이 좋은 걸로 생각했고,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런 분들에게 직분을 주었습니다. 또 우린 직분이 한 개인의 믿음인양 착각해 왔습니다. 이제는 이런 착각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어떤 기준, 난 이 기준만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확신하는 거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는, 그래서 비가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마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믿을 수 있느냐? 비가시적인 믿음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성경에서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느냐? 난 그 사람이 아브라함이라고 보는 것이구요. 아브라함을 따라 하다보면, 우리도 연약한 믿음의 사람에서 절대적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지향점은, 창세기12장이 아닌, 여기도 대단하지만, 창세기12장은 아닙니다. 또한 창세기 21장도 아닌, 물론 여기도 대단하죠. 그러나 21장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지향점은 반드시 창세기22장이어야 합니다.
이런 구분도 가능합니다. 제가 창세기22장 첫 시간에 믿음의 주상이 되는 길이 믿음일까? 행위일까? 그 표를 보여 드렸었죠.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12장, 하란 땅을 떠났다는 동적인 의미가 있지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21장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창세기22장은 믿음만은 아닙니다. 여기에 행위가 함께 하는 거죠.
우리의 행위는 반드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린 누군가요? 하나님을 믿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는 반드시 믿음 안에서 행해져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우린 판단하는 건, 자연인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판단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린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 우리의 행위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됨에는 믿음만 갖고는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믿음과 함께 어떤 행위가 수행되어야 합니다. 제가 어떤 행위라고 하는 건, 믿음 안에서의 행위는 믿음의 객체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22장은 아브라함에게만 요구한 믿음의 행위죠. 이게 여러분과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건, 아닙니다. 이건 철저히 아브라함이 한, 그래서 평범한 믿음의 사람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그의 행위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유의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그걸, 여러분은 찾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걸 여러분에게 요구할 겁니다. 그것의 대립이, 하나님은 요구하고, 나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고, 이 대립이 땅에 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제죠.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너희는 내 요구에 응하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 겁니다.
지난주 비교해 드렸던, 아담과 아브라함을 비교했었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아담과 아브라함이 비교되나요? 창세기의 개념, 그리고 요한 복음의 개념으로 두 사람을 비교하면, 아담과 믿음의 조상이 되려는 아브라함을 비교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담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빛을 잃어가고 있구요. 아브라함은 빛을 회복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컨셉은 빛입니다. 빛의 속성은 생명이고, 평안이고, 기쁨이고, 감사고, 그러나 어둠의 속성은 사망이요, 불안이요, 괴로움이요, 불평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이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해 보세요. 내가 생명, 평안, 기쁨, 감사에 속해있는가? 아니면 사망, 불안, 괴로움, 불평, 원망, 어둠, 이편에 속해 있는가? 성령은 생명입니다. 성령은 평안입니다. 성령은 기쁨입니다. 성령은 감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생명, 평안, 기쁨, 감사, 이것과는 연관이 없다면, 정말,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힘으로 쟁취되는 게 아닙니다. 평화는 오직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평화는 모든 것의 기본입니다. 가정에도 평화가 있어야죠. 가정의 구성원인 부부간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웃 간에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국가 간에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찌보면 평화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과연 우리가 평화할 수 있느냐? 평화할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는 우리가 평화할 수 있느냐? 분쟁만을 가능하게 하는 땅에서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느냐? 믿음은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평화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의 모습이 저 멀리서, 나에게 줌업 되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 나가는 겁니다.
서론이 길었는데요. 오늘은 창세기12장과 창세기22장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아담과 아브라함의 반응이죠.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 형태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잘 들으신 분, 또는 아브라함과 관계는 본문을 여기저기서, 저로부터 들은 사람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고, 또는 어떤 분은 들었을 겁니다.
창세기 12장 1,2,3절과 창세기22장 2절을 읽겠습니다. 스크린을 보시죠. 시작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12장과 창세기22장은 구조는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틀에서 내용만 조금 다를 뿐입니다.
창세기12장에는 조건절이 있죠. 이렇게 읽어도 됩니다. 1절은 2,3절 뒤에, 즉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렇게 할 수도 있죠.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이게 더 현실적이지 않나요?
해 줄 테니까? 가라!, 가면 해 줄게? 거의 의미는 같은데도, 뭔가 좀 많이 다른 것도 같죠. 어느게 더 마음에 와 닿나요? 그게 여러분의 신앙의 상태입니다. 어쨌든, 계약의 전체 내용은 같습니다. 하나, 하나죠.
이 구조중에서, 22장을 좀 더 설명하기 위해서 12장에서 한 부분만 편집하겠습니다. 창세기12장 1절 “너는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와 22장 2절 “너는 네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 이 부분을 비교하는 겁니다.
이 부분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편집합시다.
문장이 좀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이건 순수하게 비교만 하기 위함이니까? 이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세기12장 1절은 “너는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로, 창세기22장 2절은 ‘너는 네 아들을 모리아 땅으로 데려가라“로
이렇게 하면, 이게 비교 가능해 지는 거죠.
창세기 12장 1절에서 ‘네게’가 22장에서는 어떻게 되나요? 단지 ‘네게’가 아닌 ‘네 아들’로 바뀝니다.
또 ‘지시할 땅’이 ‘모리아 땅’으로 바뀝니다. 물론 모리아 땅의 한 산입니다. 여기서 한 산이란, 막연한 장소가 아닌, ‘하나님이 지정하시는 곳’ 즉 모리아 땅의 그 산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바꾸면, ‘너’니까? ‘너’가 누구예요. ‘나’입니다. 결국 ‘나’가 ‘그’가 되는 거죠.
1인칭이 3인칭이 되는 겁니다. 지정되지 않는 장소가 이제는 분명한 장소로 바뀝니다. 이 변화 이 바뀜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가 어떻다라는 걸, 알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그의 신앙의 상태가 부침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계신거죠. 그리고 그를 시험하시는 겁니다.
창세기22장2절을 창세기12장의 구조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너는 모리아 땅으로 가라’ 그리고 ‘너는 번제를 드려라’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기 22장에서, 창세기 12장에서 하신 말씀의 형태로 하신 게 아닌 전혀 다른 형태로 하십니다. 창세기12장에서 하신 말씀의 형태대로, 계속 하셨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달리 하셨다는 건,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의미로 우린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22장의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은, 지정된 장소와 지정된 사람이 있다는 거죠. 지정된 장소로 가는거, 그거야, 미지정된 장소로 가는 거보다 훨씬 좋죠. 갈 바를 모르고 간다는 거, 이것만큼 막연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나’가 ‘그’로 바뀐 거죠. 그가 누군가요? ‘네 사랑하는 아들이다’ ‘네 독자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
‘너는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를 드려라’ 하나님께서 그랬다면, 참으로 좋았을텐데, 하나님은 ‘너는 그를 데리고 가라, 그리고 그를 번제로 드려라’ 여러분, 이거 들리기는 할까요?
이거 듣고도 거부하면, 그만 아닌가요? 참 하나님 묘하신분이죠. 거의 불가능한 요구를 하시잖아요?
여러분의 어린 자녀를 하나님께 번제로, 여러분이 번제를 드리는게 아닌, 자녀를 번제로 드리라면, 드리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은 요구하실 수 있다는 거죠. 거기에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요? 둘 중의 하나죠. Yes 아니면 No입니다.
다른 걸로는 안 될까요? 양을 드리면, 양보다 더 비싼걸로는 안 될가요? 대체품은 없습니다. Yes 아니면 No입니다.
아브라함은, Yes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떨까요? Yes할 수 있나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Yes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습니다. 지극히 높여, 하늘에 있는 자, 땅에 있는 자, 땅 아래 있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2장에서 yes 할 수 있는 조건을 깔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믿음이 좋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기 22장에서는 yes 할 수 없는 조건을 깔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좋을까요?
하나님은 과연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통해, 그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텐데, 그를 통해서 믿음의 후손들에게 어떤 효과를 얻으려고 하실까요?
이건 단지 아브라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만약 아브라함이 창세기22장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성경에 그 이름을 등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누군가를 다신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거친 과정을 다시 밟아야 하는 거죠. 얼마나 번잡합니까?
아브라함은 철저히 이런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온전한 믿음을 가질 때까지 기다리신 겁니다. 그가 믿음이 떨어질 때, 강제적으로 끌어주시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마치 망나니처럼 굴 땐,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그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전 적어도 아브라함이 이 끈,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지 않고, 그래도 따라 올 수 있었던 건,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하나님이 정해 놓은 선까지 오게 된 거죠. 그리고 마지막 관문만을 남겨 두고 있는 겁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의 영육간의 모든 건, 자유,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그 자유, 그가 하나님에 불순종함으로 잃었던 자유, 그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우린 어떤 경우에도 꼭두각시, 로봇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프로그램밍한 대로 움직이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하나님이 정해 놓은 선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게 땅에 살고 있는, 땅에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인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린 땅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땅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땅은 우리의 삶의 터전입니다. 그러나 우린 어떤 경우에도 땅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동산이 있습니다. 그 동산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 그건 당연히 믿음이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우린 눈에 결코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 믿음이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마치 보이는 것처럼 믿는 거’ 그것이 믿음이라는 거죠. 또 하나는 그래서 믿음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봤다면, 그만이죠. 보여달라 보여줄 수 없지만, 봤다면 그만입니다. 기준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을 우리에게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난 여러분들도 충분히 하나님이 인정한 믿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향해, 외부적인 삶의 조건과 싸워야 하고, 내적인 갈등과 번민을 이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 속으로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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