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창세기22:1-2

2007-03-25 アップロード · 247 視聴


이 표는 지난번 보신거죠. 하나님께서 아담과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거셨을 때, 아담과 아브라함이 보인 반응을 비교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을 거십니다. 그때 우리의 반응은 우리의 영적 상태 또는 육적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담처럼, 숨는 경우가 있구요? 그리고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하죠.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 숨었습니다’ 아담은 언제나 벗고 있었는데, 왜 두려울까요? 벗어서요? 벗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죄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못했을 때 상책이 뭔 줄 아세요? 고백하는 겁니다. 자백이죠. 자백의 능력은 사도요한이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죄는 숨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십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절대속성 중에, ‘용서’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준엄하신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죄를 이기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있게 대답했다고 해서, 그에게 죄가 없느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아담과 다른 형태를 보이는 건, 아브라함의 지금의 믿음의 상태, 그의 영적인 상태가 충만, 믿음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한 상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난 여러분, 모두가 믿음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성령 충만을 경험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은혜 충만 하십시오. 옆 사람에게 그렇게 축복해 보세요. 믿음 충만하세요. 성령 충만하세요. 은혜 충만합시다.
믿음은 우리를 빛의 속성 속으로, 그리고 빛의 속성 속에 있게 합니다. 그런데 죄는 빛의 속성을 거부하게 하죠.
그런데 여러분, 아담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숨기라도 했죠. 가인은 뻔뻔합니다. 이게 죄의 속성이에요.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들기까지 하죠. 무섭습니다.
여러분, 이렇게까지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뭐, 어때 이런 태도보다는, 이러면 안되지, 이런 생각은 해야죠.
하나님은 아담에게 큰 직책을 주셨습니다.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모든 게 아담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이걸 우린 땅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그를 내 구주로 고백하면, 이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아담에게 하나님은 단 하나의 조건, 명령을 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마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아담이 살던 곳, 완벽한 곳이죠. 그렇다고 마귀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살던 때에 비하면,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 비하면, 아담의 때는 완벽에 가깝습니다.
아담보다 월등히 나쁜 조건에, 겨우 믿음을 회복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전혀 반대급부가 없는 명령을 하십니다. ‘너는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여러분,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게 지키기 쉬울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게 쉬울까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쉬울까요?
이걸 단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요?
물론 아담에게 ‘하지마라’는 명령을 하셨고, 아브라함에게는 ‘하라’는 요구조건을 하셨습니다. ‘하지마라’라고 했으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안 하면 되죠. ‘하라’고 한 거는요? 하면 됩니다. 이주 쉽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너무 쉽습니다. ‘하지 마’한건 안 하면 됩니다. ‘해’ 한건, 하면 그만입니다. 단순하죠.
그런데, 아담에게 마귀가 찾아갔습니다.
물론 마귀가 아담을 시험한 건 아니죠. 하와를 시험 대상을 삼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결국은 믿음이 부족한 자는 백이면 백, 다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죠.
마귀는 하와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마귀는 가장 약한 사람을, 하나님은 가장 강한 사람을 시험 대상으로 삼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만만하죠. 걸면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 믿음이 약한 자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믿음이 성숙한 사람, 또는 그런 과정에 있는 사람을 대상을 시험합니다. 따라서 마귀의 시험 목적은 넘어뜨리는 거구요. 하나님의 시험 목적은 더 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담은 불순종했구요.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중간에 마귀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이 금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주었을 때 아담은 거절 할 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아담에게 하와는 마귀의 대리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던 겁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되었구요?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자에서, 땅의 영향을 받아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시험이 통과되었다고, 딱히 더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실지로 구체화된 것 밖에 더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것을 앗아가거나?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보상을 조건으로 다가오지만, 하나님은 전혀 반대급부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단, 시험 결과에 따라 하늘과 땅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시험하시면서, 명령하시면서, 이거 하면 더 줄게, 그건 시험이 아니구요? 단지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 구조 속에선, 어떤 경우에도 반대급부를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에게 큰 불이익이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단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자책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고, 멀쩡히 살아 있는 이삭을, 단 칼에 하나님은 죽이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 지난주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시험방법과 마귀의 시험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마귀는 파괴하거나, 정반대로 상상할 수 없는 보상 조건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설득, 이해, 수긍 이런 방법을 쓰신다고 말씀드렸죠.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지금 설득하고 있나요?
하나님은 단지 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이것밖에 없습니다. 설득이라면, 반대하는 사람, 또는 어쩡쩡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주의 주장에 동조하도록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은 딱 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그런데 무슨, 설득, 이해, 수긍입니까?
이 표도 보신 기억이 있죠.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 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선, 두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아내 사라는 설득해야 합니다. 아들 이삭은 이해 시켜야 합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데,
이삭아! 하나님께서 니가 번제란다.
이 말이 쉽게 나올 수 있을까요? 분명 아브라함은 들었습니다. 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 들었다는 거죠.
들었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묵살할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이게 혼자 결정할 수 없는 거라는 거죠. 아내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어린 이삭은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여러분 같으면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만 결정하면 된다고 해도, 결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인데, 아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삭이 가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선 능력이 되지만, 사라나 이삭으로부터는 능력이 아닌, 죽은 말씀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는 좋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있는 정도는 낮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걸 아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건, 이삭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백세에 얻은 귀하고 귀한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고 해서, 그 아들을 절대 포기하는게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입장이 되면, 이해하실 수 있어요. 여러분 포기 라는건, 내 소유라는 거죠. 아니면, 내 것이 될, 나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는 거죠. 그걸 남에게 넘겼을 때, 그게 포기 아닌가요?
그래서 포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두고 두고 생각이 납니다. 그때 그러지 말 걸, 두고 두고,
전 이렇게 보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거 줘, 그러는 거구요. 아브라함은, 그래요 하나님 하나님꺼 가지세요.
이게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겁니다. 아담의 타락은 인간에게 소유욕을 갖게 했습니다. 소유욕이 있음으로 집착하게 되는거구요. 집착은 고통입니다. 이런 순환구조 속에 살아가는 거구요. 물론 소유욕이 긍정적인 측면해서 작용도 합니다만, 어쨌든 인간의 타락은 소유욕을 갖게 한 겁니다.
믿음의 회복이란, 이런 측면에선, 소유욕을 버리는 거, 그렇다고 해서 無 아닙니다.
여러분, 아내 사라를 설득하는게 어렵겠습니까? 아들 이삭을 이해시키는게 어렵겠습니까?
전, 이것보다 더 어려운게, 아브라함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심으로, 보세요. 여기에 시간은 없습니다. 기한이 없습니다.
몇 날이고 고민만 해도 됩니다. 질질 끄는거죠. 하나님 제가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만 더 말미를 주시면 안 됩니까? 이렇게 해서 계속, 미루면 됩니다. 사라를 설득하기 전, 이삭을 이해시키기 전, 문제는 사라를 설득해야 하는 본인, 이삭을 이해시켜야 하는 본인, 여러분 설득하려면,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이해시키려면, 자기 확산이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제가 이레에게, 다른 건 아닙니다. 모든 걸, ‘해’ 하기 싫으면 집 나가? 그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레가 절 친구처럼 대합니다. 어떨땐, 자기 남동생처럼 생각해요. 단 하나, 오직 믿음과 관계된 건, 타협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아이에게 유일한 경쟁력은 믿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 뿐이라는 내 확신 때문입니다. 그게 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설득하면서, 어정쩡하게, ‘여보, 하나님이 이삭을 드리라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야 이삭아 난 싫은데, 하나님이 널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이러면, 여러분 누가 설득당하고, 누가 이해 당하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어찌보면, 하나님께서 기한을 정해주시지 않은 건, 마냥 질질 끌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이 깊으면 좋죠. 그런데 너무 많은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려 깊다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많으면, 그건 될 일도, 그르치게 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빠른시일 내에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확신이 없거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부족하면, 시간은 많아도, 적어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내가 반드시 따라야 할 명령, 기준, 삶의 원칙, 이런 분명한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22장 2절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거구요. 3절부터는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부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은 이렇게 시작하죠.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모리아 땅으로 떠났다. 그러니, 2절과 3절의 시간은 길게 잡으면 24시간, 짧게 잡으면 12시간, 12시간에서 24시간내에,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내 사라를 설득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준행한다고 하면서, 아내 몰래, 야밤 도주하듯이, 사라는 깊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몰래, 이건 다 누구의 속성입니까? 마귀의 속성이죠.
몰래, 밤, 깊은 잠, 다 마귀의 속성을 말해주고 있는데요? 하나님은 이런걸 좋아라 하시지 않습니다.
사라가 동의한 상태에서, 이삭이 받아들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준행되는, 단 한마디의 숨김도 없이 그대로 되는 그걸 좋아하시죠.
이 모든 과정이, 2절과 3절 사이에서 결정되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고민 오래하지 마세요.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보세요. 아브라함이라고 쉽게 결정했겠습니까? 정말 이삭이 번제로 드려진 다음에, 평생 그 어린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구요. 아내로부터 남은 여생 질책을 들어야 하구요?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노망났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반대급부 없는 요구대로 행했다는거. 그게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적어도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분들에게, 강력하게 주장하는 건, 우리가 성경에 있는대로 할 수 있다면, 아브라함처럼,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대로 우리에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한다는 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굳게 믿으며, 확신하며, 그것이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여러분과 나에게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믿으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믿음대로 행해 주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ag·3월11일창세기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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