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창세기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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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았을 때'라는 말의 의미 -
(이 부분을 이애하기 위해선 표를 만들어야 합니다/자세한 표는 제 웹하드에 있습니다)
구분 아브라함 : 롯
시간 : 오정즈음 : 저물때에
장소 : 장막문 : 소돔성 문
인원 : 세 사람 : 두 천사
상태 : 앉았을 때 : 앉았을 때
식탁 : 떡, 송아지 : 무교병
버터와우유

오늘부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린 창세기 강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지난 두 주에 걸쳐 여러분들에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비교해 드렸죠. 충분히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느꼈던 감동만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게 못내 아쉽습니다.
그것보다 더 아쉬운 것은 지난주에는 너무 설교 시간에 좇기다가, 핵심적인 내용을 하지 못했어요.
제가 첫 번째 시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비교하면서, ‘믿음은 도전이다’라고 했는데, 여러분 요한복음21장1절에서 7절이 과연 믿음이 도전일 수 있을까요? 그 부분을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깜빡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까지 요한 복음을 본문으로 하면, 창세기에 대한 맥이 끊기기 때문에, 그 부분은 다음 분기때 좀 더 보완해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본문, 19장 본문으로 돌아와서, 롯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억하시죠. 아브라함과 롯이 하나님의 메신저를 만난 시간은 단순히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신앙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요. 결국, 하나님과 지속적인 만남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메신저를 만나고도,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고, 즉 믿음이 회복되고 있는 상태구요. 롯은 믿음이 바닥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메신저가 전하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던 겁니다. 메신저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는 고백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린 이걸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의 메신저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요. 믿음이 좋을 땐, 사소한 것도 감사라고, 은혜라고 고백하는데, 믿음이 없을 때, 별게 다 불만이구, 불평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감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불평하고 있는가? 그게 여러분의 신앙의 상태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은혜의 수단 다섯가지를 말씀드렸는데, 기억하시나요? 한참됐죠. 그중에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반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배, 말씀, 기도 찬양, 교제중, 찬양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제가 말씀드리는 찬양은 뭐라구요. 그저 입으로 옹알거리는 찬양, 흥얼 거리는 찬양, 길거리를 가다가, 집에서 밥을 하다가, 지하 주차장 아무도 없는 곳에서 큰 소리로 부르는 한 소절, 이게 찬양입니다. 이런 찬양을 잘 하는 사람이 불평보다는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 현대에는 하나님이 메신저는 없습니다. 그 메신저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서, 아 이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메신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닌, 메신저가 남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실로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이라도, 당연히 입에,눈에, 귀에 손에 달구 살아야죠. 나는 하나님의 메신저가 아닙니다. 나도 하나님의 메신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내가 여러분 앞에서 설교하는 것은, 내가 메신저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메신저의 이야기에서 받은 감동과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들려주는 것, 그래서 여러분들도 나와 같이 성경을 읽으라는 것을 간증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앞에서 여러분들에게 입이 아프도록 생명의 삶을 하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정말 그 말에 귀를 기우리고 있는 겁니까?
우린 성경 통독의 방법으론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게하고,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변화되지 않고,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평가를 받는다면, 그 방법, 성경을 많이 읽게하는 건, 틀린 방법이다.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방법을 바뀌어야죠.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제안하는 것이 생명의 삶을 하라는 겁니다.
그날, 그날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동받고 결단한다면, 우린 이 썩어져가는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신앙의 정도를 적어도 젊은층에 속하는 분들의 신앙의 정도를, 얼마나 찬양을 입에 달고 다니는가? 그리고 얼마나 생명의 삶을 열심히 하는가? 두 가지죠.
여러분의 믿음의 정도를 스스로 평가해 보세요. 난 오정인가 저물 때인가? 여러분 스스로가 알고 있고, 또 저도 여러분의 신앙 상태가 어떤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상태가 지금 좋다고, 계속 좋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나쁘다고, 끝까지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좋다가도 나뻐지고, 나빴는데 어떤 우연한 경험을 통해 좋아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빴다가 좋아지는 것은 환영할 만하죠. 문제는 좋았다가 나빠지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꼭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죠. 거기는 구덩이가 있어, 거기가면 위험해라고 하는데도, 꼭 청개구리처럼, 거기에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이런 걸 보는 저는 막막합니다.
두 번째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장막 문에 앉았을 때 하나님의 메신저, 물론 당시에는 하나님의 메신저인줄 몰랐죠. 단지 지나가는 나그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와 대화하고, 식탁교제를 나누면서, 그들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게 된 겁니다. 롯은 소돔 성 문 위에 앉았을 때 하나님의 메신저를 알아보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메신저를 어디서 만나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메신저는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메신저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죠.
물론 아브라함도 롯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메신저를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처음부터는 알아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아브라함은 100% 신뢰했고, 롯은 그렇지 못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세 번째는 메신저의 수와 메신저의 신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세 사람이 찾아갔구요. 롯에게는 두 천사가 찾아 갔습니다. 성경은 3이라는 수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죠. 우리가 그렇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메신저의 수와 신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이면 어떻구, 넷이면 어떻습니까? 하나면 안되겠니? 메신저가 사람이면 어떻구, 천사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이 아니죠. 그가 무엇을 전해 주느냐? 내용이 문제죠. 그리고 그것을 정말 하나님의 메시지로 확신하고,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메신저를 언제 만나느냐? 오정이야? 저물 때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메신저를 어디서 만나느냐? 장막 문이냐? 성문이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메신저의 수나 신분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오정이야, 저물때냐? 하는 것보다 좀더 조심스럽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렸던 세 가지는 다른 겁니다.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롯도 이 공통점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메신저를 보게 됩니다. 공통점은 문자적으로‘앉았다가’라는 그들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건 단지 문자적으로 읽을 순 없습니다. ‘오정과 저물때에’에 약간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처럼, ‘앉았다가’에도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창18장1절에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에 앉았다가’아브라함의 상태, 창19장1절에 ‘마침 롯이 소돔 성 문에 앉았다가’롯의 상태, 절묘하게도, 오정의 믿음이 있는 사람도 앉았다가, 저물때의 믿음인 사람에게 앉았다가, 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앉아 있다가’, 롯도 ‘앉아 있다가’하나님의 메신저를 보게 된 겁니다.
창세기 18장, 또 창세기 19장에 문자적으로 기록된 ‘앉아 있다가’는 그들의 앉음의 모습이 아닌, 삶의 상황 속에서 무기력한 그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이 회복되고 있는 상태에서 앉았있는 거구요. 롯은 믿음이 거의 바닥을 치는 상태에서 앉아 있는 겁니다. 이럴 수 있나요? 믿음이 좋은 사람도, 앉아 있다가, 믿음이 없는 사람도 앉아 있다가, 이게 무슨 의민가요?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그 단서를 한번 찾아봅시다.
지난번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지상 사역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땐, 그는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삶의 극한 환경에 빠졌던 거구요. 그날따라, 내야할 공과금도 많은데, 단 한 마리도 잡저 못했습니다. 깊은 한숨을 쉬며, 다음을 기약할 때 그는 예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횡재했죠. 그는 단순히 횡재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사역에서 만난 베드로, 그는 예수를 부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고백도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같은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도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을 때나 그의 특정한 삶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내가 믿음이 좋으면, 하늘에서 돈 벼락이 내려온다거나, 삽을 들고 땅을 팠더니, 금괴가 나온다거나, 그럴 일은 전혀 없다는 거죠. 믿음이 회복되고 있는 아브라함도, 어떤 문제에 대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지금 처해있고, 믿음을 거의 잃은 롯도 지금 뭔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고민을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저물 때 뿐만이 아닌, 오정의 믿음에서도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 짓눌려 앉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린 그 상황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자, 여기서 우린 사도행전 3장의 한 인물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은 오순절 마가 다락방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한 베드로와 요한이 생애 첫 기적을 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그들에게서, 그들의 눈에 직접 보여지게 된 겁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인물, 기적의 수혜자인 ‘앉은뱅이 걸인’에게 우린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선천적인 장애우입니다. 그는 단 한번도 서서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장애우에게 부모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제사장들 또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아니, 이 장애우는 단 한번도 성전에 들어가 본적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 성전 미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모습이죠. 이 사람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고, 그 자리에 와야 합니다. 이 사람은 무능력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방법으로 먹고 사는 걸 해결합니다.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나타난 겁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도, 과거 이 길을 자주 다녔을 겁니다. 그리고 이 걸인도, 아주 특이한 걸인을 보곤 했을 겁니다.
이 걸인은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도 여기에 앉아, ‘한푼 줍소’를 외쳤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을 향해 갈 때까지 자신의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이 앉은 뱅이가 할 수 있는 건, 그 자리에서 ‘한푼 줍소’와 ‘고맙습니다’는 말 뿐입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도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아니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사람은 불결한 사람이 되어 성전제의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이 앉은뱅이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성전의 제의도 아닌, 그의 공로도 아닌, 베드로와 요한이 외친 ‘나사렛 예수의 이름’ 그것이었습니다.
이 앉은 뱅이는 금과 은, 아니 한푼의 돈이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았습니다. 아니 이 사람은 그걸 생각한 것이 아닌, 하루 하루, 단지 하루 살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철저히 자신의 무능력에 짓눌려 살아왔던 겁니다.
이 무능력은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었는데도 그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는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고 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칩니다. ‘한푼 줍소’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그런 눈빛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에게 한푼을 줄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이 말을 외칩과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손을 잡아 끕니다. 거부할 수도 없고, 끌리는데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힘에 그는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신도 놀랐습니다. 단 한번도 서 보지 못했고, 걷는 것은 생각도 못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서서 뛰는 겁니다. 마치 구름 위를 나는 것처럼, 그는 몹시 흥분되어 있습니다. 얼마를 뛰었는지, 그는 단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성전을 향해, 뛰기 시작합니다. 그전같으면, 앉은 뱅이라고 성전 앞에서부터 제지를 당했을텐데, 성전을 지키는 자들도, 분명 사람은 그 사람인데, 라고 하면서 제지를 할 수 없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여러분, 이 앉은뱅이의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무능력함에 파묻혀 오직 하루하루만을 살아가던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성전 출입을 제지당하던 앉은뱅이가 아닌, 이제는 스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무능력을, 우리의 불가능함을 극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가능이 있음을 여러분 모두 믿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이 모습을 우린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 속으로 끌고 와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롯도, 무슨 문제 때문에, 그러나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자신의 무능력한 상태 속에서 하나님의 메신저를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는 문제,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는 무능력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아들을 낳을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자연적인 힘마저도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재산도 많이 모아 놓았고, 그리고 적자는 아니지만, 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꾸,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너는 그 사실을 믿어라. 자신이 현실을 생각하면, ‘싫습니다’이젠 제발 그만하세요. 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자꾸 자신을 연단시키기도 하시고, 고민하는거죠. 하나님의 약속이냐? 자신의 무능력함이냐? 노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하나님은 가능할 것도 같은데, 늘 자신의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신의 현실이, 그 생각을 차단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 막 갈등하고 있을때, 믿음은 좋아지고 있는데, 현실은 전혀 변화되지 않는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메신저를 보게 된 겁니다.
그럼 롯은 어떨까요? 롯의 앉은 상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린 그 단서를 본문인 19장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메신저를 융숭하게 대접합니다. OHP에도 있듯이 떡, 송아지요리, 버터와 우유, 진수성찬입니다. 지나는 나그네에게 이렇게 대접한다면, 아브라함의 재산을 우린 추정할 수 있죠. 그런데 롯은 무교병을 대접합니다. 보세요. 어제는 진수성찬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만에 전혀 형편없는 대접을 받습니다. 비교되는 거죠. 그렇다고 천사들이 대접의 정도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롯에게서 진수성찬을 대접받았다고,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다거나, 죽을 롯이 살나지 않습니다.
롯이 나그네에게, 그 나그네가 하나님의 메신저든 아니든 상관없이 지나는 나그네는 잘 대접해야 하는데, 무교병밖에 대접할 수 없다면, 그의 삶이 어떠한가 우리는 추정할 수 있습니다.
궁핍은 아니라 하더라도, 기름진 땅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는 어렵게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도시에서 자칫 잘못하면, 좇겨날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롯의 집에 찾아와 협박하는 소돔 성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롯은 그 도시 사람들로부터 지금 배척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분명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먼저 들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류 사회인이 되지 못하고, 철저히 그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거와 똑같죠. 미국땅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디언들은 보호지역에서만, 정말 보호받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롯의 상태입니다. 롯은 수십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무교병을 대접할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도시를 떠나 타향에 가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런 심리적 상태를 창세기19장 1절은 ‘앉았다가’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혹시 여러분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앉아 있는 상태는 아닌가요?’ 뭔가 해보려 해도, 현실적 조건이 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아닌가요? 여러분의 무능력을, 앉은뱅이처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무능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아니 그분은 아브라함의 무능을 제거하고 당신의 능력을 이식하셨습니다.
그분께로 오십시오.
여러분이 무능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와야 합니다. 그분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방법이 있다면, 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로 오라 하지 않습니다. 사업자금 충분하고, 매출이 느는데, 굳이 하나님께 매달릴 필요가 있나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메달리라는 겁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세요. 괴로울 때 기도하세요, 고통스러울 때 기도하세요. 저 온풍기에 붙어 있는 ‘기도만이 살길이다’는 문구는 장난삼아 붙여 논게 아닙니다. 어려울 때 생명의 삶을 피세요. 불안할 때 생명의 삶 본문으로 들어가세요. 제가 괜히 여러분들에게, 생명의 삶을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혹 아십니까?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손을 낚아 채듯이 당긴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등을 확 밀치시든가? 아니면, 무기력하게 축 쳐진 내 팔을 낚아 채실지, 그 하나님을 상상하면 난 날아갈 것 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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