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창세기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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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4.30
“아브라함을 부르시다”본문 : 창19:4-9

'눕기 전에’라는 말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소돔 성을 찾을 두 천사의 방문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왜 거기 갔나요? 창18장20, 21절에 의하면 소돔 성의 죄악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두 천사는 롯이 자신의 집으로 초청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경야할 것이다’이 말은 이거죠. ‘우리는 거리에서 밤을 새울 것이다’ 왜 거리에서 밤을 새울까요? 이들이 노숙자여서일까요? 두 천사는 소돔성의 밤 문화를 확인하려는 겁니다. 이 밤 문화를 확인함으로, 창18장 20절의 말씀을 확증하려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께 소돔성에 관한 정확한 보고를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소돔 성의 거리에서 밤을 새우며, 그들의 밤 문화를 확인하려고 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걸 포기하고, 롯의 집에서 자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롯의 집에서 자려는 건, 두 다리 쭉 펴고 자려는 거죠. 이들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은, 정탐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까짓것, 그거 확인하려고 하나님의 메신저를 보내냐? 그렇다면 전능하다고 할 수 있느냐?
출애굽기에 보면, 요셉 때문에 애굽에 간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분이 바뀝니다. 요셉 때문에 그들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이 아닌, 마치 본토인처럼 살았습니다. 적어도 요셉이라는 이름이 영향력을 갖고 있을때까지는요? 그런데 애굽의 정권이 바뀝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방인 취급을 받습니다. 아니 아예 노예 취급을 받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 이하에 보면, 그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고 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자, 보세요. 창세기18장 20절은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입니다.
출애굽기 2장과 창세기 18장은 거의 구조가 같습니다.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다’(출)‘죄악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창)‘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내게 들린 부르짖음’(창)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실행하시죠. 그것도 아주 극적으로, 만약 창세기18장의 구조대로 출애굽기도 적용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두 천사를 보내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시지 않으셨단 말이죠. 이 차이는 정말 중요합니다.
출애굽기는 구원과 관계되는 거죠. 창세기 18장, 19장 롯의 이야기는 심판입니다. 이 차이죠. 심판, 구원,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물에 뛰어 들어가 안고 오던가? 아니면 신속하게 줄을 던지던가? 해야지 허우적 거리는 사람에게, 메신저를 보내, 너 얼마나 되었냐? 지금 얼마나 힘드냐? 물은 얼마나 먹었냐? 짜증나는거죠. 물에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은, 신속하게 건져내면 됩니다. 그리고, 물어봐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신속하게 하는게 아니죠. 확인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줘야 합니다. 무슨 시간이냐면, 당연히 회개를 위한 시간이죠.
하나님은 니느웨 성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장남삼아, 시험삼아 하나님의 메신저로 요나를 보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묘막측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뒤집어집니다. 이럴 순 없다. 이래선 안된다. 요나의 머릿속에는 니느웨 성이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구나? 역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셔? 내 기도는 응답되었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삼일 길의 하루를 다니며 외쳤을 뿐인데, 네느웨성의 사람들이 뒤집어집니다. 회개하고, 통곡하고 덩달아 왕도 난리가 났습니다. 조서를 내리고, 자신이 솔선수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전혀 예상도 못했고, 요나는 정말 어찌보면, 장난삼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니느웨 길에서 외쳤을 겁니다. ‘너희는 사십 일이 지나면 망한다’ 이 말만 했을 뿐인데, 망하니까? 회개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실거야? 더 나아가 예수믿어, 예수 믿어야만 너희가 살 수 있어. 이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든지 니느웨 성쯤은 식은 죽 먹기로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사람을 보내고, 그들에게 시간을 주느냐? 그건 다름이 아닌, 구원받을 마지막 한 사람, 그 사람 때문입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구원받을 단 한사람이 아니 전체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직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 건, 예수의 재림이 지체되는 건, 다름 아닌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한 고육지책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재림이 지체되는데, 구원되는 영혼은 없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더 많다는거죠.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성에서는 니느웨 성과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은 왜 니느웨 성처럼, 요나를 보내지 않았을까요?
우린 이 질문을 창세기 속에 던져 보아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니느웨보다 더 악했을까요? 소돔과 고모라성에 가서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의 말씀을 선포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하나님의 메신저인 두 천사는 아닙니다. 그럼, 롯일까요? 사실 롯은 두 천사, 아니 아직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메신저인지 모르죠. 남 다른 인물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가 하나님이 모종의 메시지를 띄고 온 존재라는 건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획도 모르는 롯은 아닙니다. 그럼 누가 해야 할까요? 그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죄악중에 있는 사람이 아닌, 구원받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굴까요? 당연히 아브라함이죠.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떼를 쓰는 장면, 창세기18장22절 이하입니다. 전 분명 말씀드리는데, 아브라함이 이럴 시간이 있다면, 그는 당장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롯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고, 그와 함께 하든, 본인이 혼자 하든, 요나가 억지로 니느웨 성에서 하나님이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던 것처럼, 그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떼만 씁니다. 우릴 이걸 기도라고 하죠.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창세기19장29절에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전 이 기록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게 구원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대로, ‘내보내신 거죠’ 즉 살려만 주신 겁니다. 여러분, 우린 이걸 알아야 합니다. 회개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온전한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있죠. 아브라함을 그래도 조카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매우 불경스러울 정도로, 떼를 쓰죠. 여러분은 얼마만큼, 하나님께 떼를 씁니까? 아마 자녀를 위해선, 무서울 정도로, 기도하죠. 그러나 정작, 그렇게 기도한 아들이 세상에서 견디지 못하고, 믿음의 길에서 스스로 떠납니다. 아이러니죠. 그러니 여러분, 우린 멸망받아야 할 세상을 위해,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에게,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한다면, 이건 아니죠. 난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닌, 구원받은 자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 우린 구원받기 위해 교회 생활을 하고,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좀 더 굳게 하고, 예수를 더 알아감으로, 세상 속에서 마귀의 세력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함이죠. 그 승리하는 삶속에는 당연히 복음 전도도 포함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진수는 종말에 대한 거죠. 누가 복을 많이 받았느냐?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느냐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아직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서히 신앙이 자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는 부분이 4절 ‘그들이 눕기 전’이죠.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두 천사의 소돔과 고모라 성 방문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 방문을 잊은 것인지, 그들은 거리에서 경야할 생각을 포기라고, 지금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잠 자리에 들려고 하는 것은, 적어도 성경에서 하나님의 메신저들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롯이 그들에게 제안한 것을 수용한 것은, 적어도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부르짖음을 굳이 확인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소돔과 고모라 성의 타락의 정도는 극에 달했다는 거죠.
그리고 그들은 그 밤을 그렇게 보내려고 하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메신저들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건이 발생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이 떼 거지로 롯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에워쌌습니다. 롯에게 요구합니다. ‘이 밤에 우리 도시에 들어온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어디있느냐?’ ‘우린 그 사람이 네 집에 있음을 알고 있다’ 여호수아에 보면, 여리고 성의 왕아 얼마나 철저했는지, 여리고에 들어오는 이방인들, 여리고 사람이 아닌 사람이 보이면, 신고하도록 했습니다. 간첩 신고 3천만원, 간첩선 신고 5천만원, 아마 이들도 이런 상금을 내 걸었을 겁니다. 아주 철저했죠. 그때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여리고에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발각이 안될 수 있나요? 대번에 발각됐죠. 왕에게 보고가 되고, 왕은 그 사람을 체포하도록 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리고 라합의 집에 와서, 묻습니다. ‘네 집에 이방인은 없느냐’‘이스라엘 사람이 들어왔다는 말이 있는데, 숨긴 건 아니냐? ’‘숨기면, 불고지 죄야’ 간첩을 숨기면, 간첩인가요? 그렇게 봐야죠. 정탐꾼들은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정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라합의 집에 있다가, 산으로 도망가 숨어 지냅니다. 여러분, 저 표가 기가막히게도 똑같죠.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자, 라합이 없었다면, 그들은 여리고 성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리고성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침공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대비했는데, 거길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떻게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수아서에서는 여리고의 왕이 라합의 집에 이스라엘 정탐꾼이 숨어 있는 걸 몰랐습니다. 그러니 확인 차원에서 질문만 하고 돌아간 거죠.
그런데 창세기 롯의 이야기에서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롯의 집을 지목했고, 정확히 와서 요구합니다. ‘그 이방인들을 내놔라’우리가 직접 상대하겠다.
라합은 없다고, 있어도 없다고 하면 그만이죠. 있는지 모르고 왔으니까? 그런데, 롯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있는 걸 알고 왔는데,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나요? 여러분, 그래도 없다고 해야,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시는 분 있나요? 대략난감이죠.
이건 위기 상황입니다. 물론 여러분 천사들이, 하나님의 메신저들이, 하나님의 모종의 임무를 받고 온 존재들에게 위기 상황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위기는 아니죠. 왜냐하면, 이 정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이 메신저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두 명의 정탐군들에겐 아무런 위기 극복 능력이 없죠. 그들은 라합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라합의 생각과 마음을 움켜쥐신 겁니다. 그리고 철저히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겐 위기 극복 능력이 있나요?
이 위기는 두 천사만의 위기가 아닌, 롯에게 위기입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롯에겐 아무런 대비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안하죠. 먼저는 설득을 합니다. 이런 악행을 저지르지 마라.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사실 이런 행도도 바람직하지는 않은데, 롯은 자신의 집에 온 이방인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겁니다. ‘두 딸을 주겠노라“고 합니다. 그러니 롯에겐 이 위기를 극복할 만안 힘이 없습니다. 두명의 이방인도 자칫 잘못하면, 죽고, 자신은 이제 소돔과 고모라의 땅, 정든 땅을 떠나야 합니다. 젊은 나이엔 사서도 고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롯의 나이 젊지 않기에, 제2의 고향인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딸이나 정혼한 사위들이 거부할 겁니다.
그러니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롯에겐 없습니다. 그는 앞이 막막합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만가지 생각이 스쳐갑니다. 그러나 만 가지 생각이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 당장 이 소돔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힘으로 물리치지 않는 한, 대책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위기 극복 능력이 있나요? 참, 위기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우리에게 위기는 일생 한번 이상은 다가옵니다. 어떤 분들은 정말 자주 있죠.
극복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있으면, 그 능력을 잘 활용하시고, 없으시면, 정말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로 오십시오. 하나님은 무능력한 여러분을 하나님 당신께 초청합니다. 예수만이 나의 힘입니다. 예수만이 내 능력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3:20)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맡기십시오. 그분은 얼마든지 차고 넘치도록,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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