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 낙안 31운동 주역 신기리 안규인 선생

2009-03-20 アップロード · 264 視聴

민간인이 한일합방 전에 일본에 들어가 한국정부변경할 일을 의논했다?
나철의 일본행적 자세한 조사 있어야 '독립운동의 아버지'









대종교를 중광하고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홍암 나철에 대해 최근 지역민들 사이에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특히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05년부터 한일합방이 이뤄지기 전인 1909년까지 개인(민간인)신분으로 네 차례나 장기간 일본을 방문해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이등박문(이토오히로부미)등 정재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 민간외교를 펼쳤다고 하는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이다.



문제를 제기한 이들은 “정부에서 보낸 공식대표단도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더구나 일본으로 밀항해서 당시 일본의 최고 실력자인 이등박문(이토오히로부미)은 물론 정재계의 실력자들을 만나서 한국침략의 부당성을 항의하는 민간외교활동을 했다는 주장은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들은 “만약 입장을 바꿔 한 민간인 일본인이 독도(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뜻을 펴기 위해 한국으로 밀항을 해서 들어와 대통령은 물론 정재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 항의성 민간외교를 펼쳤다고 한다면 믿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만나주지도 않는 것은 물론 당장 체포됐을 것”이라면서 한심한 논리라고 일축했다.



더구나, “현지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될 것을 미리 감지하고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박제순(을사오적중 한 사람)에게 ‘절대 체결하지 말라’고 전문을 보냈다고 하는데 만약 이런 것들이 사실이라면 본격적으로 나라가 침략당하기 전 조선(정치인)과 일본(정치인)간 특정인 혹은 특정집단간의 깊은 내통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의 한 말단퇴직 공무원(민간인)이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따지러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가 장기간(1905년-1909년 총 4차, 체류기간 총 1년2개월간) 동경 번화가의 여관에서 투숙하면서 당시 일본의 최고의 실력자이며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히로부미를 비롯한 미쓰무라, 오카모토 등 정재계 인사를 직접 만나 협상테이블에 앉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주민은 “만약 당시 나철 등이 일본으로 밀항해 건너 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오히로부미를 독대할 수 있었다면 안중근 의사와 같은 행동을 했어야 옳지 무슨 얘기들을 나눴는지 조차도 알려지지 않는 밀실독대를 그저 ‘조선침략을 항의하는 민간외교’를 펼쳤다고 얼버무린다면 심각한 역사왜곡”이라고 지적했다.



민간인 신분인 나철이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을 시작으로 일본행을 계속하는데 그 자금을 누가 댔으며 일본 정재계 인사를 만날 수 있게 누가 주선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저 당시 상황을 들여다본다면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1년 전인 1904년에 이미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이후 조선총독부 참의까지 지낸 민형식(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이라는 인물이 1907년 나철 등이 계획한 을사오적 암살 미수사건에 거액의 자금을 댔다는 사실과



당시, 을사오적 암살 미수의 경우 죄명으로 ‘정부전복, 대신암살기도 내란죄’라는 중죄이며 그 주동이 나철인데 형 확정 이후 곧바로 고종황제의 특사로 사면 돼 이듬해 1908년 정훈모 등과 함께 네 번째 도일(일본행), 2개월 이상 체류하면서 일본의 정재계와 또다시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



그런데 당시 나철과 함께 일본으로 갔던 정훈모는 일본 밀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이사가 되려는 로비 활동을 펼쳤다”고 기록돼 있고 대종교를 나철등과 함께 중광하지만 친일파로 분리된 인물이다.



이런 점들이 비록 나철이 1909년 이후 민족종교를 중광해 대종교를 일으키고 민족정신을 일깨워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고는 하지만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부분들임을 지역민들은 지적한다.



그런데 나철이 이 시기에 정치활동에 종사했다는 사실은 자신이 순교전에 "정계에 생각을 끊고 종문에 헌신하여 천하를 구제하는 것을 나의 임무로 삼았다"고 말했다는 점과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2일자 '나인영(나철), 오기호씨가...근래에는 정계운동을 포기하고 조국종교를 진흥할 목적으로 종교계에만 헌신 종사한다'는 기사가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러시아, 중국, 일본의 각축 속에서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말의 상황은 당시 정치계에 몸을 담고 있던 사람들에겐 좌불안석으로 자고 나면 달라지는 세상에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이런 마당에 190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를 서서히 지배하기 시작한 일본에 대해 정치인들은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친 중국계 정치인과 친 일본계 정치인들 간의 갈등이 심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친 중국 계열에 가깝고 나철의 정치적, 사상적 스승이며 1894년 외무대신으로 재직했던 김윤식이 나철의 일본 행적을 얘기할 때 거론되는 것을 불식시키고 지역민들의 의구심으로부터도 자유롭기 위해서는 당시 나철의 도일(일본행) 직전에서 부터의 상황과 배경 그리고 일본 활동기록들을 소상히 밝히는 것이 가장 최상책임이 분명하다.(1부)











나라의 국권이 무너지던 시기인 지난 1905년부터 1909년까지, 나인영(나철)이 네 차례에 걸쳐 일본행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이토오히로부미를 비롯한 정재계의 인사들을 두루 만나 ‘항일 민간외교’를 펼쳤다는 내용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당시 신문에 나온 기사 하나가 흥미를 더하고 있다.



“모대신이 일본 진보당 영수 대외중신에게 한국정부변경할 일을 의논할 차로 라인영(나철) 오기호 양씨를 일본에 보냈더니 그 의논이 합의치 못하야 불원간에 귀국하겠다는 통신이 왔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12.25.).



이 기사는 나인영(나철), 오기호 등이 을사조약이 체결 되기 전부터 한일합방이 이뤄지기 바로 직전까지 네차례 일본을 방문한 것이 ‘침략의 부당함을 규탄하거나 항일을 위한 방문’이 아닌 ‘정부변경할 일’을 의논하기 위한 특정 정치적 목적이었다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는 중요한 기사인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역민은 “나인영(나철)등이 한일합방 직전에 당시 국내 정치계의 큰 인물(모 대신)에 의해 한일합방에 따른 한국정부변경할 일을 의논할 목적으로 대외중신(이또히로부미와 메이지유신을 이끈 3인방)에게 보내졌으나 합의를 하지 못하고 돌아올 예정이라는 내용의 기사”로 결국 나철의 일본행은 나라의 운명을 앞에두고 특정 정치인(집단)의 정치적 목적이었다고 혀를 찼다.



이어 그는 “한일합방이 이뤄지기 바로 직전에 나인영(나철) 오기호를 일본으로 보낸 인물은 그들의 오랜 스승이며 1910년 한일합방 직후에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김윤식이 가장 유력할 것”이라고 시사했다.



“당시 중추원의장이던 김윤식은 1908년 8월 12일 이또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에 들어가 일본 정재계 인사와 친교를 맺고 돌아오는데 3개월 후인 같은해 11월에 나철이 일본에 들어가 이듬해 1월까지 머물면서 정계인사들과 만나 한국정부변경할 일을 의논했다고 하는 것은 깊은 연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나철은 순천부사를 지내고 영선사에 임명된 김윤식의 수하에 1880년대 전반에 제자로 들어가면서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해 1891년 나철이 승정원 가주서가 될때까지 10여 년간 김윤식의 집에 머물렀고 이후 제주에 유배된 김윤식을 나철이 5년간 배종하고 대종교도 함께 중광 할 정도로 깊은 관계였다.



또한, 기사 내용 중 ‘한일정부변경할 일’은 곧 '한일합방조약에 따른 내용들'임을 알 수 있고 의논이 합의치 못했다는 것의 결과는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 온 김윤식이 한일합병 조약의 초안을 조약체결의 주모자인 이완용 조중응등과 의논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조중응의 기록에 의하면 "일한병합을 맞아 먼저 우리들의 최후의 각오를 정하기 위해 이완용과 내(조중응)가 특히 상담상수(相談相手)한 이는 중추원 의장 김윤식이었다. 협의 결과, 김윤식이 우리들의 일치된 결단을 기술한 것이 있다. (小松綠, {朝鮮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920, 198면)"



고려대 한국사 배항섭 강사는 이 때 김윤식이 쓴 초안은 '역사적기초비안'(歷史的起草秘案)으로 '동양평화'와 인민을 '구제'한다는 논리로 망국을 합리화시킨 것으로 김윤식은 한일'합병'이라는 매국의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실은 이면에서 매국노들과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당시 중추원의장이던 김윤식이 1908년 8월 이토히로부미와 동행, 일본으로 들어가 정재계 인사들과 친교를 맺고 돌아온 3개월 후 공교롭게도 김윤식과 긴밀한 관계였던 나철이 이기호등과 일본으로 들어가 진보당 영수 대외중신과 한일정부변경할 일(?)이라는 의구심 짙은 주제로 서로 의논했고 김윤식은 이후 이완용, 조중응등과 함께 한일합방 조약서 초안을 협의하고 한일합방이 체결된 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일련의 일을 설명하고 있다.



“모대신이 일본 진보당 영수 대외중신에게 한국정부변경할 일을 의논할 차로 라인영(나철) 오기호 양씨를 일본에 보냈더니 그 의논이 합의치 못하야 불원간에 귀국하겠다는 통신이 왔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12.25.).



기사에서처럼 나철을 일본에 보낸 ‘모 대신’이 나철(을사오적 암살미수 사건시)에게 거금의 자금을 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작위까지 받은 민형식이었는지, 오랜 스승이며 중추원 의장으로 한일합방이후 작위를 받고 1908년 8월에 이또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에 들어간 김윤식이었는지는 좀 더 밝혀야 하지만



당시 공무원도 아닌 민간인 신분에 불과했던 나철을 정부대신이 일본으로 보내 ‘이또히로부미와 함께 일본 정계 3인방 중에 한 사람인 대외중신과 한국정부변경할 일을 의논’하게 했다는 것은 특정 정치적 목적수행을 위한 일이지 결코 항일운동이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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