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무지개를 이은 왕비-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와 마사코비의 이야기(虹を架ける王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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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무지개를 이은 왕비-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와 마사코비의 이야기(虹を架ける王妃~朝鮮王朝最後の皇太子と方子妃の物語)

원문제목 : 虹を架ける王妃~朝鮮王朝最後の皇太子と方子妃の物語
장르 : 드라마 / 로맨스 / 시대극
본방송국 : 후지TV
방송기간 : 2006.11.24 - 2006.11.24
방송시간 : 금요일 21:00
방송편수 : 1부작
국내등급 : 15세 이상
국가 : 일본
공식 홈페이지 : http://www.fujitv.co.jp/niji/fset_sou.html
연출 : 카와케 슌사쿠

출연 : 칸노 미호 - 이방자 (이마사코)
오카다 준이치 - 영친왕 이은
와타나베 잇케이 - 고의경
히로타 레오나 - 나카가와 타에
하라다 미에코 - 나시모토노미야 이츠코
후루야 잇코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야마모토 가쿠 - 하타노 요시나오
우에다 코이치 - 이토 히로부미

프로듀서 : 나카지마 쿠미코
니시오카 요시노부
사카이 미노루
각본 : 마키노 노조미
제작사 : 후지 TV


♣ 등장인물 소개
이방자 (이마사코) - 칸노 미호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영왕(英王) 이은(李垠)의 비.
일본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장녀로 1918년 일본 가쿠슈원(學習院)을 졸업한 뒤, 1920년 4월 한일융화의 초석이 되라는 일본 왕의 명령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황태자인 이은과 강제로 정략혼인을 하였다. 그뒤 일본에서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생활하였으며,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3년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영왕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전부터 구상하여왔던 장애인사업을 추진하여 1963년부터 1982년까지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직을 맡았으며, 1966년 1월 사단법인 자행회(慈行會)를 설립하여 정신박약아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헌신하였다. 한편, 1967년 11월 YMCA에서 빈민돕기사업을 하던 재단법인 보린원(保隣園)을 인수하여 농아와 소아마비아를 위한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하였는데, ‘명휘(明暉)’는 영왕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명휘원의 교육기관으로 1978년 명휘회관(明暉會館)을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세웠다. 이곳에서 교육받는 불우한 이들의 자립을 위하여 일본에서 배웠던 칠보를 만들어 파는 등 헌신하였다. 1971년 경기도 수원시 탑동에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여 갈 곳이 없는 정박아들을 교육시켰으며, 1973년 자혜학교 여자기숙사도 설립하였다. 또한, 같은해 그의 숙원사업이던 영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이사장이 되어 활동하면서 영왕과 왕가의 유물들을 보전하는 데 마지막 사명을 다하였다. 이후에도 자행회와 명휘원의 총재직을 계속 맡아 활동하였으며,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아들 구(玖)와 지내다가 1989년 귀국하였으나, 이해 4월 30일 낙선재에서 죽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영왕과 합장하였다. 1972년 서울시문화상,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 소파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지나온 세월》·《The World is One》·《세월이여 왕조여》 등이 있다.

영친왕 이은 - 오카다 준이치
이은(李垠). 1897∼1970.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고종의 일곱째아들이며, 어머니는 귀비엄씨(貴妃嚴氏)이다. 영친왕(英親王) 또는 영왕(英王)이라 칭하기도 한다. 순종과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1900년 8월 영왕에 봉하여졌으며,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그해 12월 이토(伊藤博文)통감에 의하여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순종이 폐위되어 이왕(李王)이 되니, 황태자였던 영왕 역시 단순히 왕세제(王世弟)로 격하되었다. 1920년 4월 일본황실의 이른바 내선일체 융합정책에 따라 일본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맏딸인 마사코(한국명 方子)와 정략결혼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는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렸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하였다. 일본에 강제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단절 및 국내정치의 벽에 부딪혀 귀국이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하여 황족으로서의 특권을 상실하고 재일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간고한 나날을 보냈다. 그뒤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가 오래도록 꿈꾸어온 불우한 이웃을 돕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생전에 부인 이방자와 함께 1966년에 심신장애자재활원인 자행회(慈行會),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훈련원인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하여 사회봉사의 뜻을 펴고자 하였다. 그의 사회봉사의 정신은 사후에도 이방자에 의하여 1971년 영친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교육시설인 자혜학교(慈惠學校), 1982년 신체장애아교육시설인 명혜학교(明惠學校)설립 등으로 계승되었다.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내에 능이 있으며, 1989년 4월 30일 죽은 부인 이방자와 합장하였다.

고의경 - 와타나베 잇케이
조선에서부터 영친왕을 모셨으며 가장 영친왕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중에 한명.

나카가와 타에 - 히로타 레오나
마사코가 어렸을 때부터 마사코를 모시던 시녀.

하타노 요시나오 - 야마모토 가쿠
궁내대신 하타노 노리나오. 이츠코 비전하에게 마사코의 영친왕과의 결혼을 부탁한다.

이토 히로부미 - 우에다 코이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한국에서는 이등박문으로도 알려져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대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 추밀원 의장, 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 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작위는 공작이며, 칭호는 명예박사(예일대)이다. 아명은 도시스케(利助)로, 후에는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슌보’(春畝, 춘무)나 ‘창랑각주인’(일본어: 滄浪閣主人, そうろうかくしゅじん)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스오노쿠니 구마게 군(지금의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으로 어려워 12세 무렵부터 일을 나섰다. 아버지가 조슈 번의 무사 집안인 미즈이(水井)가의 양자가 되면서 하급 무사의 신분을 얻고, 성을 이토(伊藤)로 바꾸었다. 요시다 쇼인의 쇼카 촌숙(松下村塾)에서 수학한 뒤, 다카스키 신사쿠·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토막 운동에 참여했다. 1862년에는 공무합체론을 주장하던 나가이 우타의 암살을 획책하고,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 참가하는 등 존왕양이 운동에서 활약했다. 곧 영국으로 떠났다가, 귀국해 혁신파에 참여한다.

1864년,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다카스키 신사쿠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보수파를 타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참여,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 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정한론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정부 요인들이 정치 현안 및 향후의 문제에 대해 논의한 오사카 회의를 알선하기도 했으며,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된 후에는 내무성 장관이 되어 유신 3걸의 한 명으로 이름을 높였다. 메이지 14년 정변으로 오쿠마 시게노부 등이 실각한 뒤에는, 헌법 제정을 위해 유럽에 건너갔으며, 초대 추밀원 의장으로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다. 1885년에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1900년에는 입헌정우회 총재가 되었으며, 러일 전쟁 전에는 러일협상론이나 만한교환 등을 주장하며 러시아와의 전쟁을 반대했으며, 영일 동맹에도 반대했다. 강화 후에는 전후 처리에 힘을 쏟았다.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통치를 위해 통감부가 설치된다. 이때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취임했으며,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 시기 진행했던 정책은 결국 조선에 반감을 불러왔다. 1907년 5월 22일 을사 조약에 공을 세운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 등으로 구성되었다. 1909년 통감직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했지만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 역에서 한국의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사망했다.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뤄졌다.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 후루야 잇코
메이지 텐노의 조카로서 마사코의 아버지이다. 딸 마사코와 영친왕과의 결혼을 담담히 받아들이려 한다.

나시모토노미야 이츠코 - 하라다 미에코
나시모토노미야 이츠코비(梨本宮伊都子, 1882 - 1976)
아버지는 사가의 마지막 번주인 나베시마 나오히로 후작(1846 - 1921), 어머니는 공작 히로다카 타네야스의 5째딸인 나가코(1855 - 1941)이다. 1882년 2월 2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생하였으며, 출생 7달 후에 일본으로 갔습니다.
15세때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1874 - 1951)와 약혼했고, 1900년 11월 28일 결혼, 1901년 11월 4일 장녀 마사코를 출산했고, 1906년 유산, 1907년 둘째딸 노리코를 낳았다. 장녀 마사코는 영왕과 결혼해서 진, 구 두 아들을 낳았고, 차녀 노리코는 어머니의 외사촌인 히로타카 타다미츠와 결혼해서 2남 3녀를 낳았다.
이츠코비는 프랑스어등 외국어에 능통했고 예법에 밝고 미모가 뛰어난 화족 최후의 귀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츠코비는 1909년 1월 남편 모리마사, 무관, 귀족딸, 시녀, 의사 등 10명과 함께 유럽 순방을 하며, 마지막으로 7월 20일 조선으로 가서 순종 황제를 만났다. 남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는 군인으로 육군 대장을 지냈고 종전후 전범으로 체포되었고, 재산도 대부분 몰수되었는데, 1954년 한국전쟁 휴전후 회수했다. 이츠코비는 1976년 4월 히로히토 일왕과 나가코 왕비를 10년만에 만났고, 4개월 후인 1976년 8월 95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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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9 19:59共感(0)  |  お届け
陰日向に?く
리즈
2013.05.09 21:09共感(0)  |  お届け
(*^_^*)삭제
波龍1558
2011.05.20 22:39共感(0)  |  お届け
잘담아갑니다삭제
jms3525
2010.09.11 22:19共感(0)  |  お届け
담아가요 ^^삭제
시즈꾸
2010.02.13 09:31共感(0)  |  お届け
담아갈게염^^삭제
칼레이서
2010.01.30 01:46共感(0)  |  お届け
잘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삭제
시즈꾸
2010.01.11 12:21共感(0)  |  お届け
담아갈게염^^삭제
아일다
2008.11.23 15:26共感(0)  |  お届け
행복합니다!!! 잘보고 가요 고맙습니다*^^*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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