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의 인생 엿보기

2007-07-06 アップロード · 3,590 視聴

그의 고향은 충북 괴산면 청천면...

음식점 주방장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넉넉지 않은 집안살림이었지만 구김살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가끔 고향을 찾을 때면, 어릴 때 뛰어 놀던 청천면의 맑고 푸른 강산을 돌아보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
고향만큼 아늑한 안식처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집안은 20년이 넘게 호흡기 질환으로 앓아오신 아버지의 병수발로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청주 유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당시 마을 사람들의 권유와 격려로 어렵사리 청주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그는 또다시 진로선택을 놓고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집안 형편은 서울 유학길을 뒷받침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장남인 그가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는 것이 동생들의 학업을 막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가난은 언제나 그를 무겁게 짖누르는 멍에였다.



"가난의 해방구로 치과 대학을 선택했다"

"동생들과 집안형편을 생각하면 서울유학은 당치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감하게 치과대학을 지원했습니다." 그가 연세대 치과대학에 합격한 날, 가족들은 큰 희망에 부풀었다. 가족 모두 그가 치과의사만 되면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1973년은 유신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시대였다. 본과 3학년 때 그는 학내 시위 주동하여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전국 의대생 중 제1호 구속이었다. 2년여 감옥생활을 하면서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치과대학 생활에서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점은 치과의사로서의 사명감을 가질 수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치과의사가 되어야겠다는 목적의식이 결여됐어 있었습니다."


"유신시대, 전국 의대생 중 제 1호로 구속되어.."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는 육체적으로는 구속된 생활을 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해방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하루 한편씩 시를 외우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직접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못을 하나 구해 벽에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게 지금의 저를 시 쓰는 국회의원으로 만들게 됐습니다."

1979년 광복특사로 석방된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지만, 정상적인 학교생활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졌고, 이때 그가 복학생대표자협의회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제적과 함께 또다시 구금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수배자로 쫓기는 처지가 된 그는 노동현장에 투신하게 된다. 경기도 부천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한 그는 소위 위장 취업자들과 함께 조직활동도 했지만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의무 때문에 10년간이나 진짜 노동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전기공사 1,2급, 소방설비기사 1급, 전기주임 안전관리기사 2급, 전기공사기능사 2급 등 모두 6개의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완전한 노동자로서 생활하였다.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현장으로.."

이 와중에 병든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입원을 보면서 당시 고통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자식이 웬수라던 불화의 십년 / 나는 하는 일마다 그의 가슴을 찔렀다.(중략) / 그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날 밤 잠든 내 손을 잡고 당신 손으로 호스를 빼고는 내 곁에 영원히 누웠다"(- 임종 중에서)

" 희망이란 오직 자식 잘 기르는 일 못 먹고 자란 것이 한이 되어 잘 먹이고 남 보란 듯 가르쳐 금의환향 자식만 기다리며 사시다가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신 어머니."(-가족분단기1 중에서)


"입학 15년만에 치과대학 졸업하다"

그러나 잊을만하면 불거져 나오는 신원조회가 문제였다. 직업선택의 자유마저 잃어버린 그는 할 수 없이 치대생으로 돌아갔고 졸업 후, 서울 삼각지에 믿음치과를 개업, 의사의 길을 걸었다. 대학에 입학한지 15년만의 졸업이었으며, 당시 그의 나이 서른 세살이었다.

"이제 졸업입니다. /아버지 5년 다녀도 못한 졸업 이제야 하게 되었습니다(중략)
평생 당신 소망이었던 사각모 쓰고 가운 입은 졸업이겠네요" (-아버지에게 중에서)

대학졸업을 아버지의 음덕으로 돌린 그는 치과병원 개원에 이어 91년에는 첨단 전기전자회사를 설립해 멀티미디어 시험장비 등 20여개 제품을 개발하는 등 다각적인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96년 국회의원에 출마하다"

1996년 그는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당시 정계 입문은 민주화운동 연장선상이었습니다."

이렇게 입문동기를 밝힌 그는 신출나기치곤 비교적 높은 직책을 맡았다. 민주당 부대변인에 이어, 국민회의 창당 후, 당 10역 중 하나인 정세분석실장에 중용되었다. 연공서열을 유난히 중시하는 정치권의 관행으로 미뤄볼 때 그의 중용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남다른 정보수집 및 분석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기도 안산시에서 출마, 6명의 기라성같은 후보들을 제치고 35%의 득표율로 당당히 여의도에 입성하였다.


"김영환, 땀냄새 물씬 나는 정치인"

그의 광폭인생을 모두 한편의 글에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지난 하루하루 삶에는 짙은 땀냄새가 이로새겨 있고, 이를 현실정치에 투영시키기 위해 지금도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깨끗하면서도 할 일은 하는 유능한 정치인으로 자리잡고 싶습니다"는 그의 정치 소신은 국정감사 평가가 처음 실시된 1999년과 2000년에 국정감사 1위로 자리매김하도록 하여, 그의 정치소신이 결코 헛된 구호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김영환 의원은 시대를 앞서가는 정치 감각과 과학적인 사고로 무장된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열어가는 정치인이다. 이제 재선의원이 되었지만, 그의 땀흘리는 의정활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황지우 시인이 그를 의원 뱃지를 달고도 얼굴이 변하지 않은 정치인으로 평가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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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2009.11.21 16:03共感(0)  |  お届け
쓸모없는 국방예산,주민혈세, 미군에 들어간 한해 예산 19조원 에서 20조원 ,불필요한 군대 숫자, 노비화, , 군대 이동이나 영해권,미군대 권한이져,,대책;;;;;;;;;;;;;;; .삭제
노을
2007.07.10 09:22共感(0)  |  お届け
사랑합니다.. 김장관님삭제
영원한팬
2007.07.06 05:36共感(0)  |  お届け
항상 응원 합니다!삭제
강윤정
2007.07.06 05:28共感(0)  |  お届け
항상 노력하시는 모습 .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에 힘을 보냅니다!삭제
여의도통신
2007.07.06 05:20共感(0)  |  お届け
ㅋㅋ 김영환 짱!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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