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꼭 가봐야 할 제주도 4.3 유적지

2007-04-03 アップロード · 4,617 視聴

[2007년 3월30~4월3일, 제주 4.3항쟁 유적지 답사 영상보고서]

호우예보에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주도 날씨답게 모자가 날려갈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한라산은 잠들지 않는다는 노랫말처럼 바람 역시 4.3 추모기간을 맞아 조용히 잠을 잘 수는 없었나 봅니다.

아침 10시, 관덕정(觀德亭) 앞에서 일행들과 합류를 했습니다. 비록 소수이지만 서울에서, 인천에서, 경북에서, 광주에서, 전북에서, 강원도에서 멀리 제주까지 날아와 4.3항쟁유적지 도보탐방에 동참해준 동지들을 만나니 불끈 힘이 솟았습니다. 하루에 20킬로미터쯤 걷는 것쯤은 거뜬할 것 같았습니다.

조선 세종 때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관덕정은 4.3항쟁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절 총격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이날 기념식 후 시위가 벌어졌는데, 경찰의 발포로 6명이 희생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일파만파로 번져 사상 초유의 민관총파업으로 이어졌고, 끝내 4ㆍ3사건이 발발하는 도화선이 됐습니다.

2.
관덕정에서 간단하게 파이팅을 외치고 4.3항쟁유적지 도보탐방 첫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중앙로터리, 동문로터리, 국립제주박물관, 오현고를 지나 화북동에 도착했습니다. 이른바 ‘곤을동(坤乙洞)’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이름 그대로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1949년 1월 4일 군인들에 의해 24명이 희생된 곳입니다. 게다가 마을이 초토화된 이후에는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로 불리는, 4.3항쟁의 상징적인 마을입니다.

마을엔 돌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위령비에 쓰인 대로, 그날 이후 초가집 굴묵(굴뚝) 연기와 멜(멸치) 후리는 소리는 간 데 없었습니다. 마을과 접한 해안에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부가 세워 놓은 ‘4.3 해원상생 거욱대' 표석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 국화꽃을 바치며 죽은 자에게는 안식을, 산 자에게는 평화를 염원해 보았습니다.

3.
화북동 비석거리에서 주문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다음 차량을 타고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초등학교로 이동했습니다. 북촌마을은 1949년 1월 유격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숨진 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양민들에게 보복학살이 가해진 마을입니다. 당시 북촌마을 집 300여 채는 모두 잿더미로 변했고, 북촌초등학교에 내몰린 마을 사람들은 군인, 경찰 가족을 빼놓고는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학살이 어찌 끔찍했던지 그 일대에는 시체들이 뽑힌 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북촌초등학교 정문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백 미터쯤 가니 옴팡밭에 애기무덤들이 있었습니다.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이 있어서 '너분숭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는 애기무덤 20여 기가 4ㆍ3 당시 참혹했던 북촌대학살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후 어른들의 시신은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녀자 등 일부 주민들에 의해 안장되기도 했지만 어린아이들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기에 ‘너분숭이 애기무덤’이라고 불립니다.

잔디는 고사하고 변변한 표식도 없이 누워있는 애기무덤들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아이들은 천사라는데, 무고한 어린생명을 앗아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모는 물론이고 친척마저 사라져 시체마저 수습할 수 없었던 아픈 역사의 현장. 도저히 ‘무덤’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고 그저 돌무더기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은 모습은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더욱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4.
북촌에서 도보로 1시간 정도 걸어서 선흘리 낙선동성에 도착했습니다. 1948년 11월 20일, 선흘리 역시 초토화 작전으로 불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49년 봄이 되자 살아남은 사람들이 집단거주와 방어 목적으로 돌로 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감귤밭의 담장이 되어 남아 있었습니다.

성벽 곳곳에는 총알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또 밖으로 총구를 겨누었던 구멍들은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저 세찬 바람으로부터 감귤나무를 지켜주는 돌담에 불과했습니다. 감귤나무에는 샛노란 감귤이 아직도 덤성덤성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렇게나마 낙선동성은 4.3의 비극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습니다.

5.
1948년 11월 25일, 선흘리 목시물굴에서 1㎞ 남짓 떨어진 도툴굴이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었습니다. 동굴 속에 피신해 있던 주민들은 현장에서 총살당했고, 일부는 끌려갔습니다. 그 중 한두 사람이 밤새 무자비한 고문에 못 이겨 목시물굴의 존재를 토해냈습니다.

다음날 아침, 토벌대는 길잡이를 앞세우고 묵시물굴로 향했고, 마을이 초토화된 후 동굴 속에 은신해있던 200여 명의 선흘리 주민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토벌대는 전날 고문을 받고 목시물굴을 안내한 길잡이도 현장에서 총살했다고 합니다.

목시물굴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습니다. 안에는 제법 넓은 공간도 있다지만 얼핏 보기에도 적당한 피난처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곳으로 내몰렸고, 수류탄과 총탄 세례에 허망하게 쓰러져 갔습니다. 깨진 그릇이며 옹기 파편들은 지금도 남아 그들의 조각난 삶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6.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모진 시절이 있었습니다. 또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아픔을 겪은 분들이 있습니다. 세월은 흘렀어도 상처는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상처를 건드리거나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프면 아픈 대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우리는 증언해야 합니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라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화해와 상생을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유채꽃이 샛노랗게 피어나듯 ‘4.3’ 역시 해마다 봄이 되면 제주를 찾습니다. 하지만 올해도 여전히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발길 닿는 곳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주도 유채꽃에는 피가 맺혀 있다’고.


제주에서 이틀째 되는 날 김두관 올림


ⓒ 김두관 TV


* 제주도를 다시보게하는 역사기행 보고서는 김두관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dreamkorea.net

tag·아이들과,가봐야,제주도

非会員の場合は、名前/パスワードを入力してください。

書き込む

희망보고-김두관

リスト形式で表示 碁盤形式で表示

02:42

공유하기
한드미 마을을 아시나요?
9年前 · 5,219 視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