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북TV] 책읽는 사람들_고규홍_<베토벤의 가계부>.3

2009-02-11 アップロード · 497 視聴

오늘은 60년대 중반 메리퀀트가 유행시켰던
미니스커트 패션쇼가 열렸던 날이죠.
여성의류 중 최고의 히트 상품이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오는 옷이기도 합니다.

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단속 대상이었고,
영국에서도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비난받았지만,
대중의 인기에 영국정부에서는
퀀트에게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미니스커트,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개성을 중시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유행을 이끌어가고
사회를 반영하는 역할을 담당하지 않을까요?

안녕하세요? 책 읽어주는 사람, 백승주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미래 세대를 준비하는 보건복지가족부와 함께 합니다.
<보이는 라디오, 책 읽는 사람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고규홍의 <베토벤의 가계부>를 만나봅니다.
모차르트에서 베토벤을 거쳐 쇼스타코비치까지,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한
음악 거장 22명의 경제문제를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본 책, 『베토벤의 가계부』.

우리에게 음악가의 전기 자료가 부족할 텐데요,
저자인 고규홍씨는
어떻게 자료를 구했을까요?


INS) 고규홍 인터뷰

자료가 부족하다는 상황이
오히려 용기를 갖도록 해주었다고 하는 고규홍씨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INS) 고규홍 인터뷰



연대기 순으로 펼쳐지는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베토벤과 같은 시대에 슈베르트가 있습니다.

그는 베토벤과 함께 고전파 최후의 거장이자,
낭만주의 음악의 개막을 예고한 ‘가곡의 제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피아노 한 대 살 돈도 없었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INS) 고규홍 인터뷰


낭독 (백승주)

슈베르트는 고액의 저작료를 받는 날이면,
친구들과 화려한 만찬을 벌여 하룻밤에 적잖은 돈을 모두 써버렸다.
그리고는 돈이 떨어져 오선지를 살 돈이 없는 지경에 처해
친구의 도움을 구하곤 했다.
궁핍과 낭만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던 천생 로맨티스트였다.
가난은 그의 낭만적 음악을 키우는데 떨어져서는 안 될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필연으로 31년의 짧은 삶을 지배했다.
짧은 생의 마지막 3년 동안
그는 온 힘을 다 바쳐 최후의 작품들을 쏟아냈다.
1826년 초에는 셰익스피어의 시에 곡을 붙인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 소리를!>과 <누가 실비아인가?>를 내 놓았으며,
마지막 <현악4중주 G장조>와 <피아노 소나타 G장조>를
내놓은 것도 그해였다.
그가 그토록 흠모하던 베토벤이 서거한 1827년에는
가장 널리 사랑받는 그의 대표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완성했다.
거장으로서는 너무도 짧은, 그러나 탄생시킨 작품의 양적, 질적 성취도로
서는 결코 짧지 않는 생애를 슈베르트는 불같이 살았다.
생애 내내 그는 베토벤, 괴테 등 당대 최고의 예술인들과 호흡을 같이 했으
나, 생전에는 최소한의 부도 명예도 누리지 못했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기운이 살아 숨 쉬는 도시 빈에서,
‘피아노 신동’이라고 불리던 음악가가 있었으니,
바로 쇼팽입니다.
쇼팽은 자신의 음악세계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무관심 했는데요,
자신의 이상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
피아노에만 몰두 했습니다.

그는 저작권 수입을 계산할 줄 몰랐던 ‘돈맹’이었고,
자신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던 오페라 티켓을 사기위해
레슨 수입에 매달렸습니다.
당연히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낭독 (백승주)

대중적 연주회를 연다 해도,
쇼팽은 연주회 입장 수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음악을 대중 앞에 드러내 보이고 그로써 자신의 예술가적 명성
을 인정받는 사실 자체에 만족했다.
실제로 피아노 연주활동으로 생을 마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숱하게 열었던
그 많은 연주회 가운데 수익을 낸 연주회는 단 3건에 불과했다.
도무지 이재에 요령부득이었던 쇼팽은 출판을 통한 수익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의 음악가로서의 재능이 알려지면서 출판업자들이 몰려들어 흥정을 하려
했지만, 쇼팽은 저작권료를 계산할 줄 몰랐다.
알았다 해도 그런 계산에 신경을 바쳐 시간 쓰는 게 귀찮았다. 쇼팽은 자신
의 모든 작품을 1만 7천 프랑이라는 어이없는 가격에 팔아 치우고 말았다.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어이없이 내버린 채 다시 그는 알량한 레슨
수입에 매달렸다. 레슨 수업료도 그랬다.
그는 시간당 20프랑의 수업료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쇼팽의 명성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낮은 가격이었다.
레슨으로 쇼팽은 한해에 1만 4천 프랑을 벌었다.
작곡과 연주회로 분주했던 그가 연 700시간을 레슨으로 소요했다는 이야기
다.
큰돈을 벌어들일 기회는 나 몰라라 집어치우고, 알량한 레슨에 매달린 청맹
과니 꼴이었다.



INS) 고규홍 인터뷰


저작권 수입을 계산할 줄 몰랐던 쇼팽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한 저작권 관리로 돈을 모은
음악가도 있는데요,
‘오페라의 귀재’라고 불리던 베르디입니다.

INS) 고규홍 인터뷰

낭독 (백승주)


자신의 작품에 철저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베르디를
이탈리아 청중은 대단히 불만스러워했다.
그런데도 그는 조국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불만을 돈으로 보상해주기까지 했다.
오페라 <아이다>가 초연되었을 때의 일이다.
가난한 시골 농부 한 사람에게 베르디는 난데없이 청구서를 받았다.
농부는 청구서를 동봉한 편지에서 모든 일을 팽개치고 두 번이나 <아이다>
를 감상했지만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고 썼다.
농부는 베르디에게 <아이다>를 보기위해 든 기차 요금 5.9리라,
극장표 값 8리라, 식사비 2리라 등 한회에 15.9리라씩 31.8리라의
배상을 청구했다.
베르디는 즉각 출판업자로 하여금 다시는 자신의 공연을 보지 않을 것을 조
건으로 원하는 액수대로 배상해주도록 했다.
그는 작품료를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자신의 작품에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관객의 권리를 이처럼 철저하게 인정했다.
그는 죽기 전에 사재를 털어 은퇴한 음악가들을 위한 이른바
‘음악가 휴식의 집’을 만들었다.
3층짜리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일이 생애 마지막 사업이었다.


베르디는 어마어마한 돈을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자선단체, 병원, 장학재단에
내놓았습니다.

오늘 들으신 프로그램은
미래세대를 준비하는 보건복지가족부 홈페이지와
온북 TV 홈페이지를 통해, 보이는 라디오로 언제나 들으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책 읽어주는 사람, 백승주였습니다. *


한국방송공사
<연출 김영준, 글 장화식, 진행 백승주, 조연출 서승표,
출연 - 고규홍
제작 연용호, 신혜정, 최광식 /
김형대, 김동섭, 이화중, 최영숙>

베토벤의 가계부 / 마음산책

(제작/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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