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名人 사기장 김윤태씨]

2006-12-27 アップロード · 4,341 視聴

[

(부산=연합뉴스) 민영규 기자 = "임진왜란으로 맥이 끊겼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다완(茶碗.차사발) 제조기술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자부합니다. 이제 조상의 지혜를 뛰어넘는 현시대의 다완을 만들어 전승시키는 게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칠십 평생을 도자기 재료인 흙과 물, 유약, 물레, 가마와 함께 해온 도봉(道峰) 김윤태(金允泰.70)씨의 말이다.

부산 기장군 일광면의 작업장에서 만난 김씨는 취재진에게 `농도가 짙은 알코올 등 독성이 있는 액체를 담으면 이를 흡수해 독성을 제거한 뒤 다시 내뱉는 기이한 다완을 내보이며 자신이 평생을 두고 발전시켜온 오묘한 다완의 세계로 안내했다.

1936년 경북 문경 동로면 적성리에서 할아버지(김상희) 때부터 도자기를 굽는 가마를 운영했던 집안에서 태어난 김씨는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가마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장난 외에는 특별한 놀이가 없었을 정도로 도자기와 자신은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말한다.

2005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3호 사기장으로 지정된 김씨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국보가 된 이도다완(井戶茶碗) 등 현재 문헌으로 남아있는 다완 30여종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적당한 흙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불순물을 제거하는 톳물받기, 흙을 반죽하고 기포를 없애는 꼬박밀기, 물레에 올려놓고 모양을 만드는 성형, 성형과정에서 생긴 흠을 제거하는 물메질, 유약을 만들어 바르는 일,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불 때기와 가마를 만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도자기와 관련된 모든 과정을 해낼 수 있는 희귀한 인물로 통한다.

선친(김종원)이 일찍 별세하는 바람에 어릴 때부터 숙부(김창동)로부터 잔심부름을 하며 생활도자기 제조법을 익혔다는 김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어 충북 단양까지 불려 가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씨가 기능보유자(사기장)이면서도 드물게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김씨가 다완의 달인이 되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실력있는 도공들이 모두 일본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우리나라에는 다완 제조기술의 맥이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에 처가인 충북 단양의 가마에서 생활도자기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김씨에게 그 재능을 알아차린 부산의 한 골동품상이 찾아오면서 그는 다완과 함께 하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이 골동품상은 국내에서는 막사발이라고 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일본에서는 차사발로 귀하게 여겼던 다완의 도록을 내보이며 한번 재현해볼 것을 권유했다.

제조법이 없는 도록만 갖고 고려시대의 다완을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수백 번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김씨의 집념은 결국 수백 년을 뛰어넘는 조상의 지혜를 깨닫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어릴 때부터 어떤 흙과 유약이 어떤 자기에 사용되는지 몸소 체득했던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한다.

김씨는 "흙을 알아야 제대로 된 자기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여러 가지 흙을 한꺼번에 쓰는 다완은 흙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귀띔한 뒤 "지금은 도록만 봐도 어떤 흙과 유약을 써야 하는지 안다"고 자신했다.

일본으로부터 끊임없는 주문이 쇄도하자 김씨는 1973년 다완용으로 쓰이는 양질의 흙이 풍부한 경북 상주로 가마를 옮겼다.

그의 가마 명칭이 상주요(尙州窯)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이 부산을 통해 끊임없이 일본으로 고가에 팔려나가자 김씨는 3년 뒤인 1976년 부산 기장군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1980년부터는 일본 각지를 돌며 작품 전시회를 열었으며 전시회는 일본의 다완 애호가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비로소 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그의 진가가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칠십 평생을 흙을 만지는 바람에 지문이 다 닳아버린 김씨는 지금도 가마에 불을 지피기 전에 목욕 재계하고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섭씨 850~900도로 초벌구이를 한 뒤 1천250~1천300도의 고온으로 재벌구이를 하고 나면 가마에 넣은 다완 가운데 쓸 만한 작품은 평균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심지어 작품이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모양과 빛깔은 비슷해도 살아 숨 쉬는 다완을 만들기란 다완의 달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특히 투박한 듯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양을 자랑하는 고려시대 다완은 받침대를 적당히 다듬은 뒤 유약을 충분히 발라도 원하는 작품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차를 따르면 물을 흡수한 다완의 표면에서 서서히 꽃과 같은 문양이 나타났다가 마르면 문양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분청다완도 김씨에게는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다.

김씨는 "다완은 살아 숨 쉬는 그릇이기 때문에 특히 애정이 간다"면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다완은 어느 정도 재현해 후계자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지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예전에 없던 다완을 만들어 후세에 전해주는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틈만 나면 전국 각지를 돌며 좋아보이는 흙을 퍼와 다완을 만들어 본다.

김씨의 이 같은 예술혼은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아들 영길(40)씨는 일본의 요업대(窯業大)를 졸업한 뒤 울산에서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도예작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딸 영화(44)씨는 홍익대 동양화과에 출강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다.
youngkyu@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무단전재-재배포금지]

tag·한국의,名人,사기장

非会員の場合は、名前/パスワードを入力してください。

書き込む
今日のアクセス
3,340
全体アクセス
15,960,093
チャンネル会員数
1,786

사회

リスト形式で表示 碁盤形式で表示

01:11

공유하기
[방독면 쓴 거리의 화가]
10年前 · 18,793 視聴

00:57

공유하기
[조선시대 전주 한눈에]
10年前 · 547 視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