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초대석 안면도 안면암 지도법사 석지명 스님

2008-12-27 アップロード · 224 視聴


일출.일몰 대장관서 불생불멸 진리 깨달으며 구도정진

"광대무변함, 무차별성 등의 가르침 바다에서 배워요"
"무(無)의 득(得)이 진짜소득, 행복하려면 행복 잊으라"
"서산에 해 지면 동녘서 달 떠오른다는 희망 발견해야"

(안면도= 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붉은 바다로 풍덩 빠져드는 태양이 찬란하다 못해 처연하다. 하루를 내달려 서녘에 이른 뒤 미련없이 자신을 내던지며 사라지는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일몰이 있기에 멋진 일출도 있는 법. 하염없이 펼쳐지는 파노라마에 잠겨드노라면,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삶과 죽음이 결국 한 덩어리라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낙조 풍경으로 세간에 잘 알려진 충남 태안반도의 안면도(安眠島). 이름처럼 온갖 번뇌와 고통으로 시달려온 무명중생의 삶을 편안히 잠재우고 새로이 태어날 수 있는 안온한 품이다. 그래서인지 바다를 앞에 펼쳐둔 채 가부좌를 틀고 있는 암자들이 눈에 띈다.

안면암(安眠庵)은 간월암(看月庵)과 더불어 안면도와 천수만 일대를 대표하는 암자다. 안면암이 뭍에 둥지를 두고서 밀물 때마다 바다에 둥실 떠오르는 조그만 섬과 마주하고 있다면, 간월암은 평소엔 뭍과 이어지되 밀물 때마다 섬이 되고 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천수만을 바라보는 안면암은 지호지간에 속칭 조구널이라는 두 아기 섬을 앉혀놓고 오늘도 만남과 헤어짐을 숙명처럼 되풀이한다.

삶의 이치도 이러지 않을까? 밀물과 썰물에 이어지고 끊어지길 반복하지만, 알고 보면 결국 하나임을 이들 암자와 섬은 무언으로 일깨워준다. 이승과 저승이, 속세와 법계가 외떨어져 있는 듯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일몰과 일출 또한 삶과 죽음처럼 둘이 아니다 싶으니 석양을 관조하는 마음이 꽉 찬 듯 허허롭다.

"늙어가기 때문일까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갈수록 감회가 깊어집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길목에 서노라면 육신의 옷을 벗을 날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옴을 느끼기도 해요. 하지만 그건 작은 육신에 집착하는 이기적 감상이겠고, 새해는 새롭게 더 잘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업에 끌려 다니지 말고, 중생에게 회향하는 무엇인가를 행하자고 다짐하게 되죠."

안면암의 지도법사 석지명(釋之鳴) 스님. 한때 경기도 의왕 청계사 주지와 속리산 법주사 주지, 불교조계종 종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나 지금은 모두 버리고 충남 괴산의 각연사와 안면도의 안면암을 오가며 수행ㆍ포교에 힘쓰고 있다. 안면암은 스님이 10년 전 지금의 자리에 창건한 암자. 해변의 언덕에 위치해 있어 바다의 표정 하나하나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매년 12월 31일 저녁과 1월 1일 아침에는 안면도와 천수만 일대에서 펼쳐지는 일몰과 일출의 대장관을 보기 위해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곤 한다.

세속의 나이로 올해 회갑을 맞은 스님은 바다와 인연이 깊다. 특히 2004년 겨울에는 20년 된 낡은 무동력 요트를 타고 다섯 달 만에 태평양을 횡단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집채같은 파도와 싸우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며 생명을 건 탐험을 감행한 것이다. 스님은 그 길고 긴 여정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나라 안팎이 험악한 경제난의 폭풍과 파도 속에 휘말려 있어 삶의 지혜를 듣기 위해 지난 19일 찻잔을 사이에 두고 스님과 마주앉았다.

-- 스님께선 유독 바다와 인연이 깊으십니다. 해양도시인 부산의 범어사로 동진출가하셨고, 2004년엔 무동력 요트로 태평양을 횡단하셨구요.

▲ 어린 시절 범어사에서 공부할 때, 영도 바닷가에 가보곤 했습니다. 그 무한함과 걸림 없음에 감동이 무척 컸어요. 그래서인지 국내외 모든 여행지는 꼭 해변이나 섬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태평양 횡단까지 하게 되었구요.

절에서는 방생법회를 많이 가지는데, 1990년도 중반에 방생장소를 물색하러 다니다가 이 터를 발견해 안면암을 창건했죠. 암자 건너편에 있는 조구널 섬에 오가기 쉽도록 스티로폴로 부상교(길이 약 160미터)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걸 신기해하며 좋아해요. 해변을 따라 홀로 걷다 보면 나를 찾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 불경의 가르침을 따라 바다로부터 배우려다 보니 바다를 좋아하게 됐다고 하셨는데요.

▲ 화엄경을 비롯해 여러 불경에서 바다의 공덕을 찬탄합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광대무변함, 철저한 밀물과 썰물의 시간,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무차별, 어디서나 한결같은 짠맛 등으로 심오한 가르침을 안겨줘요. 저도 바다를 관조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수행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좋기만 한 건 아니지요. 평소에는 아주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심술이 나면 변태적 난폭자가 돼요. 이런 폭풍노도가 이는 건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행복하기 위해선 기다림과 인연, 인내가 필요함을 바다는 말없이 가르쳐줍니다.

-- 결국 마음의 평화이겠는데, 스님께선 그 방법으로 무(無)를 강조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이며, 일반인들이 어떻게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일몰도 일종의 무이겠습니다만….

▲ 무는 비움이고, 지움이고, 털어버림이고, 내려놓음입니다. 아무 것도 없던 본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이죠. 지금 이 자리의 내가 남들이 알아주는 큰 일을 하지 못한다고 억울해할 것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평화롭고 자족하는 삶이에요. 무는 껍질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저는 일몰을 염라대왕의 엽서라고 해석해요. 뜬 해는 져야 하고, 산에 오르면 내려 와야 합니다. 일몰은 허영의 자만심이 부질없음을 깨우쳐주죠. 언젠가는 반드시 놓아야 한다는 진리를 말이에요.

승리하고 최상의 자리에 올라서 얻는 기쁨도 물론 있어요. 하지만 이는 소수의 것이죠. 반면에 패배하고 최하의 자리에 내려와서 얻는 기쁨 또한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다수의 것입니다. 잘난 이나 못난 이, 가진 이나 못 가진 이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해주는 것이 무의 즐거움입니다.

본래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어느 것 하나 소득 아닌 게 없어요. 지우고 비우면 소득이 있다거나 모두가 소득이다는 거죠. 무소득, 즉 무(無)의 득(得)이야말로 진짜 소득이랄까요?

-- 심리학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비교하지 말 것을 권합니다. 스님 역시 부동심과 평화를 얻으려면 비교하지 말라고 이르셨는데요.

▲ 남과 비교해서 밖으로 구하는 것은 끝이 없어요. 완전한 성취라는 게 불가능하죠. 아무리 풍요를 누린다고 해도 남에게 의지하는 이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외적 성취는 인위의 조작적인 것입니다. 조작은 무너질 수밖에요.

우리는 원래 있는 무위의 성취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본래부처예요. 내가 본래부처라는 말은 내적으로 무한한 환희를 발산하는 발전기가 우리에게 본래부터 갖춰져 있다는 뜻입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면, 권력이나 명예나 재력에서 남보다 높고 낮을 것이 없어요.

-- 남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이유의 밑바탕에는 선악 이분법이 있기 마련입니다. 부처에게도 악이 있고, 악마에게도 선이 있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 중국의 천태선사는 "부처와 악의 화신에게도 똑같이 선과 악이 들어 있다"고 했어요. 다만 부처는 악을 잠재우고 선을 일깨우는 반면, 악마는 선을 잠재우고 악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거죠. 이를테면 부처가 선의 극치라면, 악마는 악의 극치이겠습니다.

이 말은 결국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적과 동지, 선과 악을 고정적인 것으로 구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상대에게서 악의 마음을 끌어내면 악이 될 수 있고, 선의 마음을 끌어내면 동지가 될 수 있겠죠. 어느 악인이 처음부터 악인으로 살겠다는 원을 세우고 이 세상에 나타났겠습니까.

-- 특히 한국인은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만큼 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남 흉보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깎아먹는 행위일 텐데요.

▲ 우리는 의식하든 못하든 남의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입만 벌리면 남에 대한 평가예요. 그것도 상당히 심해서 흉보기 중독증이라고나 할까요? 평가도 대부분 상대에 대한 약점에 집중되기 마련이지요.

이런 흉보기 중심의 평가 뒤에는 자신의 비판력과 분석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요. 한 대상을 비판하고 분석하다 보면 자연히 결점이 부각돼요. 남의 흉을 봄으로써 자기의 능력이나 위상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심리적 불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일본인들에게 배울 필요가 있어요. 그들도 우리처럼 남의 말을 하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면 딱 멈춰요. 남의 허물을 구체적으로 꼬집어내려는 상황을 피하는 거지요. 남을 나쁘게 말하지 않을 수 있으면 그가 바로 최고의 인격자입니다. 다시 말해 남을 좋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돈 없이도 베풀 수 있는 최상의 보시지요.

--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가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국가 중 가장 낮다고 합니다. 내면의 자유와 행복보다 외형의 성장과 과시에 매달린 결과가 아닌가 한데요. 더불어 행복하려면 행복에서 벗어나 행복을 잊으라는 말씀이 인상깊게 다가옵니다.

▲ 행복지수 조사에서 가난한 나라인 방글라데시가 1위로 나타나곤 하지요. 이는 뭘 시사할까요? 물질적 풍요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오히려 행복을 깎아낸다는 역설이기도 해요.

행복에 보탬이 되리란 기대에서 우리는 사랑, 돈, 힘, 명예라는 족쇄에 묶여 그 종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억지로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불행 또한 없어요. 행복을 지우면 그 반대도 자연히 지워지는 거지요. 행복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에게 어렵거나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에요.

행복은 나비와 같아 잡으려 하면 도망가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날아와 어깨 위에 앉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금강경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와요. 부처는 부처를 지웠기 때문에 부처라는 거지요. 행복을 잊는 자리에 바로 행복이 있어요. 그리고 그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으며, 거창한 데 있지 않고 사소한 데 있습니다. 즉, 내 안에 있는 행복을 끌어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에요. 물질과 외형에 구속된 외부의 행복은 참행복이 아니구요.

-- 보시 공덕은 스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무와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재물의 임시보관자인 우리로서 이 보시의 공덕을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 보시를 강조하다 보면 소유 자체가 영구적이 아닌 임시적인 것이 되지요. 은행이 고객의 돈을 임시로 보관하듯이 말입니다. 인연과 무상을 가르치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것을 영원히 절대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우리가 본래 갖고 온 건 하나도 없어요. 빈 손으로 왔지요. 지금의 소유물은 모두 받은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는 그것을 놓고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은혜망인 셈이지요. 불교는 소유하는 걸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가 남에게 넘겨줄 임시보관용이라는 점을 깨우치려 합니다. 형편이 되는대로, 인연이 닿는 대로, 무엇인가를 주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무척 어렵습니다. 특히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태평양 요트 횡단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난국을 견딜 수 있는 지혜를 주시지요.

▲ 항해를 하다 보면 바람보다 파도가 무섭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이 바람이라면, 우리 마음에 이는 불안감은 파도가 되겠지요. 우리가 맞는 미국의 금융위기나 그 여파를 맞는 우리의 경제 난국은 흉년이 들어서 생긴 것이 아니에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허점의 부작용이 누적돼 한꺼번에 드러난 거죠.

곡식이나 기름같은 자원이나 기술력이 부족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진실로 생산적인 방면으로 마음을 모으지 않고 다단계 방식으로 이용하려고만 든다면, 풍년에도 얼마든지 흉년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지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경제난를 극복할 때까지 우리는 희망을 갖고 견뎌내야 합니다. 무서운 외부의 바람과 고통스런 내면의 파도를 이겨야겠지요. 대부분의 항해사고가 바람이 아니라 파도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도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행복 찾기의 큰 돛폭은 우선 접고, 그저 살아 남기의 작은 돛폭을 펴라고 권하고 싶어요.

스님은 허리 디스크와 이명증, 간과 신장질환 등으로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사생관으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누구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데, 이를 받아들이면 어떤 병이 무섭고, 누구의 홀대를 두려워하겠느냐는 거다.

관건은 역시 마음이다. 마음이 고통과 즐거움을 지어내고, 나와 남을 가르기도 한다. 이 마음의 장난을 쉬면 육신의 감옥도 저절로 사라진다는 생각이다. 스님은 화엄경의 구절을 빌려 마음은 화가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에겐 그 그림을 그릴 자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림을 그리되 자신과 남을 모두 살리는 쪽으로 그리자는 거다.

"요즘 죽음에 아주 근접해 있음을 느껴요. 그래서 더욱 누군가를 위하는 일,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을 해야겠지요. 죽음이 왔을 땐 언제든지 편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음을 계속 확인하고 있습니다. 취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이 없다는 것도 분명히 하고 있어요.

생사해탈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해탈하지는 못했지만, 죽음의 인연이 닥쳤을 때,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각오가 있어야 무료로 얻는 하루 한 시간 일 초를 맛있게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서글픈 건 생에 집착하기 때문이고, 그 집착이 더할수록 삶의 존엄함과 의연함은 사라지고 말겠지요."

그러면서 지고 사는 삶의 지혜에 대해 들려준다. 종국에는 누구나 모든 것을 놓고 질 수밖에 없어서란다. 경쟁의 세계에 살되 경쟁하는 마음을 갖지 말자는 거다. 이는 승패의 집착을 여의고,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적 표현을 빌면 하심(下心)이 되겠다. 하심을 실행할 때 시작과 끝, 나와 남이 똑같아져서 아무리 져도 패함이 없고, 아무리 굽혀도 굴함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깨끗한 승복과 포용은 이긴 자나 진 자가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스님은 강조한다.

"일몰의 노을만 응시하다 보면 서글픔에 젖어들기 쉽습니다. 하지만 서산에 해가 떨어지면 동녘에서 달이 떠오른다(日落西山 月出東嶺)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지는 해에 집착하고 있으면 서글픔이겠지만 뜨는 해로 고개를 돌리고 나면 곧 희망이라는 뜻일 겁니다. 끝은 또다른 시작일 뿐이니까요."

영상제공:안면암, 편집:심지미 VJ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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