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주민 3천여명 3.1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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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연합뉴스) 김도윤 기자 = "피고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는 취지를 선동하는 불온문서를 작성해 가평군 북면의 주민들에게 배부하거나..(중략)..부질없는 행동에 찬동하게 하고..(중략)..조선독립만세를 부름으로 말미암아 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동을 함으로써 안녕 질서를 방해한 자들이다"
대정(大正) 8년인 1919년 4월26일 경성지방법원 형사부는 경기도 가평지역 독립투사 28명에게 징역 6월에서 4년을 선고하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가평지역의 3.1운동 역사자료를 수집중인 이용환(84)씨는 "타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는 많이 알려졌지만 가평의 것은 아무도 모른다"며 "주민 3천여명이 지역을 관할하는 일본 헌병대를 무력화시킨 것은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어린 시절부터 가평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대에 붙들려 옥고를 치른 아버지로부터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평 투사들의 항일정신이 잊혀져 가는 것을 아쉬워 하던 이씨는 1980년부터 당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했으며 부산의 국가기록보존소에서 가평 독립만세 운동 기록이 담긴 판결문 1권을 찾아냈다.
1919년 3월1일 서울 인사동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직후 현장에 있던 가평출신 이규봉 선생 등 독립투사 3명은 독립선언서를 옷속에 감춘채 사흘을 꼬박 걸어 가평에 도착, 같은달 15일 오전 9시 군청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는 내용의 비밀통문과 선언서을 배포했다.
15일 이른 아침부터 가평읍내는 여기저기서 몰려온 선비들과 농민들로 술렁이기 시작했으며 북면에서는 이규봉 선생이 의관을 갖추고 집을 나서다 많은 주민들이 뒤따라 오는 것을 수상히 여긴 일본 헌병대의 검문을 받았다.
사태를 파악한 이규봉 선생은 그 자리에서 당당히 독립만세를 외치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으며 헌병대가 길을 열어주지 않자 뒤따라온 한 제자가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를 본 주민들도 하나 둘씩 품속에 있던 소형 태극기를 꺼내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라는 문구가 적힌 띠를 머리에 둘렀으며 추가 배치된 헌병대 조차 이를 막지 못했다.
급기야 인근 마을에서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몰려들어 군청까지 가는 길은 대한독립만세 소리와 태극기 물결로 변했으며 군청 앞은 3천명이 넘은 주민들의 만세 소리를 진동했다. 곧이어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자 주민들을 숙연해 졌으며 낭독이 끝날 무렵 누군가 소리없이 태극기를 치켜들고 이규봉 선생이 만세 삼창을 외치자 군청 앞은 다시 만세소리로 가득했다.
가평 주민들이 토해내는 울분에 일본 헌병대는 감히 접근할 수 없었으며 이날의 만세운동은 예상외의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해가 지고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자 일본 헌병들은 오후 8시를 기해 주동자 색출에 나섰으며 70여명의 애국지사들이 가평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됐다.
이곳에서 일본 헌병들은 20일 동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구두발로 짓밟는 등 매질을 당했으며 이 가운데 28명이 경성지방법원 형사부에서 굴욕적인 재판을 받았다.
현재 이용환씨의 아버지인 이홍복 선생을 비롯 16명만이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등을 받았으며 나머지 애국지사들은 재판기록에 이름만 남아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이용환씨는 "조국 광복에 목숨 받친 애국지사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며 "이들의 혼을 영원토록 기리기 위해 자료를 수집, 책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기억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kyoo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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