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名人 배첩 장인 홍종진씨]

2007-04-24 アップロード · 2,780 視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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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연합뉴스) 윤우용 기자 = "열다섯 살 때 시작한 일이 어느 덧 42년이나 됐습니다. 남보다 머리가 뛰어나지 않아 배첩 외에 다른 길을 선택할 생각도 못했지만 후회나 미련은 전혀 없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에 바람마저 스산하게 불던 4월 어느날.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에 위치한 청주시 배첩 전수 교육관을 찾았다.

배첩 전수관은 1999년 11월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배첩장.褙貼匠)로 지정된 홍종진(洪鍾鎭.57)씨의 작업장이다.

청주시는 2004년 12월 홍씨가 후진을 양성하고 중요 문화재를 보존 처리하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국비 등 6억여 원을 들여 이 전수관을 마련해 주었다.

손을 잡아 끄는 홍씨를 따라 전수관 1층 작업실에 들어서자 `미다스의 손인 홍씨 덕분에 생명(?)을 건진 그림과 붓글씨 액자 수십여 점이 이방인을 반갑게 맞이했다.

손을 대면 액자에서 금방이라도 뛰쳐 나올 것처럼 작품 모두 생동감이 넘쳐 났다.

"배첩은 글씨나 그림에 종이나 비단 등을 붙여 족자, 액자, 병풍 등을 만들어 아름다움은 물론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 주는 전통 서화 처리기법"이라고 소개한 홍씨는 "일본에서 사용되는 표구라는 말이 우리 국민의 귀에 더 익숙한 것 같아 안타깝다"며 말문을 열었다.

홍씨는 삼국시대에 전해져 조선시대에 크게 발달한 것으로 알려진 배첩의 역사 등을 간단하게 설명한 뒤 배첩 세계에 입문하게 된 배경부터 이야기 보따리를 거침없이 풀어 놓았다.

1950년 12월 충남 천안시 동면에서 태어난 홍씨가 연고가 없던 청주에서 배첩과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딱히 익힌 기술이 없어 먹고 살 길을 걱정하던 차에 동네의 한 어른으로부터 우연히 `배첩 기술을 배우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홍 씨는 이 동네 어른의 소개로 청주에서 표구사를 운영하고 있던 윤병세(20여 년 전 작고) 선생을 찾아갔다.

홍씨의 스승인 윤 선생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 기능 보유자이자 배첩 최고 권위자인 김표영(82)옹의 스승이기도 하다.

홍씨는 1966년부터 7년간 윤씨로부터 숱한 꾸지람을 들으면서 배첩 기술을 사사(師事)했다.

스승으로부터 뛰어난 기술을 배웠지만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오고 있던 홍씨는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 세련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스승의 허락을 받아 서울 관훈동 일대 `표구골목을 전전하는가 하면 틈나는 대로 관련 서적을 읽으며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았다.

10년여의 고생 끝에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기술을 익혔다고 판단한 그는 1975년 6월 꿈에 그리던 표구사를 청주에 차렸다.

"처음 배첩 기술을 배울 당시 스승께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줘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조하셨어요"

홍씨는 `문화 유산을 다음 세대에 제대로 넘겨 주는 게 소임이라는 스승의 말씀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개업 당시에는 `표구라는 말이 생소한 데다 표구사가 거의 없어 에피소드도 많았다고 한다.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하다 보니 표고버섯을 사러 오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많은 손님들이 표고와 표구를 혼동하신 것 같아요"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던 홍씨의 얼굴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가업을 잇겠다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3년째 후계자로 나선 아들(30)이 배첩 기술을 배워 소중한 문화유산을 200-300년 뒤의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홍씨는 "`배첩 기술을 배울 생각이 없느냐는 권유를 1년여 간 받아들이지 않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겠다고 답해 매우 기뻤다"며 "걸음마 수준이지만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배우고 있는 게 고마울 따름"이라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홍씨는 문화재 보존 작업을 할 때마다 혼과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아들에게 강조한다.

이런 홍씨의 장인 정신 덕택에 너덜너덜하게 헤졌던 국보급 문화재 6점과 보물급 문화재 15점이 온전한 모습으로 재탄생,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안성시 칠장사의 오불회괘불탱(국보 296호), 청주 보살사의 영산회괘불탱(보물 1천258호), 영천시 수도사의 노사나불괘불탱(보물 1천271호), 안성시 청룡사의 감로탱(보물 302호) 등도 그가 집도한 수술대(?)에 올랐던 유물이다.

이 외에 청주대, 충북대, 청주교대 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청주고인쇄박물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 670여 점도 홍씨 덕분에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소중한 문화 유산을 오래 보존하느냐 여부는 얼마나 빨리 보수, 복원작업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홍씨의 지론이다.

조기에 암을 발견하면 치료할 수 있듯이 문화재도 제때 보수하면 200-300년, 심지어 400년 이상 더 보존할 수 있다는 것.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배첩의 기본 재료인 풀과 한지라고 홍씨는 강조했다.

특히 필요할 때마다 풀을 만들어 배첩을 하면 좀이 생기기 쉽고 문화 유산은 얼마 못 가 훼손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스승 윤병세 선생 이전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방법으로 풀을 만드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수제자인 아들도 풀 쑤는 일 만큼은 아버지의 영역으로 여겨 넘볼 수 없다고 한다.

잘못 쑨 풀로 보존 처리하면 소중한 문화재가 영원히 땅속에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비법은 풀의 원료로 쓰일 밀가루와 물을 섞어 옹기에 넣어 10년간 삭히는 데 1년에 두 번씩 물만 갈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보관하면 자연스레 옹기에 벌레가 생기고 이 벌레들은 밀가루에 있는 영양분을 모두 빨아 먹는다.

그런 다음 물을 쏟아 버리고 밀가루를 고운 체로 걸러 말린 뒤 필요할 때마다 꺼내 풀을 만들어 작업을 해야만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고 홍씨는 귀띔한다.

홍씨의 이 같은 고집으로 배첩 전수 교육관 옥상 등에는 퀴퀴한 냄새가 풀풀 나는 80여 개의 옹기가 주인이 부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각고 끝에 배첩 권위자 반열에 오른 홍씨의 가슴 한 구석에는 아직도 씻지 못한 응어리가 남아 있다.

배첩의 최고 권위자이자 큰 어른인 김 옹으로터 1997년부터 3년간 기술과 장인 정신을 배웠고 지금도 가르침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제자인 자신이 스승보다 먼저 전수관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그는 이 같은 죄송함을 하루 빨리 털어버리고 기술을 전수해 주신 스승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은 오직 한가지 길 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홍씨는 "실력과 인품을 갖춘 국가 지정 문화재가 돼 이 전수관을 온전히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며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 보관돼 있는 2층 전시실로 발길을 옮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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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웅
2008.05.29 08:47共感(0)  |  お届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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